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9월 13일) 주교 , 교회학자

ohjulia 2006. 9. 13. 05:37
 고향으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주교 ,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성인의 활동연도 : +407년 성인과 같은이름 : 금구, 요안네스, 요한 금구, 요한금구, 요한네스, 조반니, 존, 크리소스또모, 크리소스또무스, 크리소스똠, 크리소스토모, 크리소스토무스, 크리소스톰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으나,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친구로 후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 (Diodurus)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Melitius)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어린 간청 때문에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 (Flavia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90년부터는 신약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황제는 요한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난하여 악화되었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 (Arcadius) 황제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 후 404년에 황제는 그를 다시 쿠쿠수스(Cucusus, 지금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되자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한은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e)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 안티오키아 출신의 위대한 설교가인 요한을 둘러싸고 있는 애매모호함과 흥미 진진함은 대도시에서 살던 위대한 사람의 생애답다. 시리아에서 12년 동안 사제로서 봉사한 다음, 콘스탄티노플로 온 요한은 자신이 제국의 가장 큰 도시의 주교가 됨으로써 황제의 계략에 희생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금욕주의자로 눈에 띄지 않는 품위가 있는 요한은 수도자로서 사막생활을 하는 동안 얻은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제국 정치하에서 주교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의 신체는 약했지만, 그의 혀는 강했다. 그의 설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허망한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설교의 요점은 고관들과 권력자들을 괴롭혔다. 어떤 설교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궁정에서 그의 생활 양식은 몇몇 대신들만이 알아챘다. 그는 황실과 교회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는 교구청 관리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제공했다. 요한은 고위 관리들 앞에서 그에게 상석을 내어 놓는 궁정 의례를 비판했다. 그는 매수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열성이 그를 결정적인 행동으로 이끌었으니 승진을 위해 뇌물을 쓴 주교들은 면직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가난한 이들과 재산을 나누어 쓰는 구체적 단계를 제시했다. 기혼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들만큼 부부간에 성실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아담 때문에 사유 재산이 존재했다는 요한의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요한은 정의와 애덕이 실현될 때, 이 두 가지 가치 기준이 하나로 결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연하고 정력적이고 솔직한 요한이 특히 설교대에서 흥분할 때에는 개인 문제에도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는 좋은 포도주와 훌륭한 음식을 몰래 실컷 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부유한 과부인 올림피아의 성실한 영적 지도자였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부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위선자라고 험담을 했다. 소아시아에 있는 무능한 주교들을 반대한 그의 행동은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탐욕적이고 교회법에서 부여한 권위를 크게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을 개인적으로 공공연하게 비난하던 두 명의 유력한 인물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로와 에우독시아 황후였다. 테오필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요한에게 이단을 추종하고 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테오필로와 분노한 다른 주교들은 에우독시아의 지원을 청했고 황후는 황실 궁정 생활의 사치를 복음적 가치와 대조시키는 그의 설교에 분개하고 있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악한 이세벨과 간악한 헤로디아에 대한 설교들은 황후와 관련되었고, 황후는 마침내 요한을 추방시켰다. 그는 470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