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자신의 고정관념 안에 상대방을 넣지 맙시다.

ohjulia 2006. 9. 21. 05:53
2006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에페소서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복음 마태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지에 있다 보니 신학교 동창이나 선배 또는 후배 신부님들을 오랜만에 만나게 됩니다. 같은 교구이면 자주 만날 기회가 있지만, 교구가 다를 경우에는 만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하지만 제가 있는 자리는 본당이 아니라 성지이기 때문에 신학생 때 알았던 분들을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은 제가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꼭 무엇인가를 들고 오십니다.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술입니다. 양주를 들고 오시는 분들도 많고, 아니면 맥주를 박스째 가지고 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 술을 들고 오실까요? 저는 지금 술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잘 마시지도 못합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면서 호흡이 가빠지거든요. 그런데 왜 이런 저에게 술을 그렇게 많이 들고 오실까요?

사실 저도 예전에는 술을 많이 마셨답니다. 특히 신학생 때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이렇게 신부가 되어서도 예전에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술을 선물로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신학생 때와 지금을 한번 비교하여 봅니다.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도 많이 다른 저의 모습을 바라볼 수가 있네요. 아침 기상 시간인 6시에도 일어나지를 못해서 동창들이 항상 깨워주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2~3시면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하루에 2~3갑은 거뜬히 피워 없애던 골초가 담배를 피우지 않은지 벌써 5년째가 되었습니다.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가장 어려워했던 제가 일주일에 최소한 2권 이상을 읽고 있고, 벌써 책도 4권이나 출판했습니다.

신학생 때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으로 변화된 제 모습에 스스로도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다 변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변화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상대방을 위축시켰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을 맞이해서, 오늘의 복음에서는 마태오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 사도.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세리를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지요. 누구나 다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 변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누구보다도 멋지게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누구나 다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의 고정관념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일을 행해야 할 그 사람의 일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사람은 매일 매일 바뀝니다. 아마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아도, 심지어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포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주님의 모습을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 안에 상대방을 넣지 맙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행복 만들기’ 중에서)
사랑 속에 있는
섬세한 관심과 순수한 믿음,
더 바랄 것 없는 만족감,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를 이루기 위한 열정과
성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첫째, 우리 마음에 사랑을 품는 것이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둘째, 행복은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되고 있음을 느낄 때 찾아옵니다.
셋째, 진실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다섯째,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여섯째,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일곱째, 나눔입니다.
여덟째,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홉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열번째,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뜻하지 않게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듯 씨를 뿌리고
돌보아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행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