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주님의 일꾼이 됩시다.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일꾼이…….

ohjulia 2006. 10. 5. 13:18
2006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욥 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


복음 루카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전에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한 편 본 적이 있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어떤 야구 선수에 대한 내용인데, 오랜만에 신나게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영화였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등장하는데, 글쎄 자신의 애인을 위해서 야구선수가 땅볼을 잡아서 관중석으로 공을 집어 던집니다. 아주 엉뚱한 장면이지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 또한 엉뚱한 상상을 하나 해봅니다. 제가 미사 강론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얼마만큼은 가만히 계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20분? 아닐걸요? 아마 1분만 제가 가만히 있어도 웅성대는 소리가 성당을 가득 메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느님께서 이렇게 엉뚱한 행동들을 즐기신다면 어떨까요? 세상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행동들을 하느님께서 과감하게 1분 동안 멈춘다면 어떨까요? 아니면 이 세상일들이 엉뚱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도록 뒤죽박죽 섞어 놓으면 또 어떨까요?

절대로 안 되겠지요. 세상에 엉뚱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하느님만큼은 그러한 엉뚱한 일들을 즐기시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걱정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엉뚱한 일을 하시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들에게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들에게 충실하신 주님과는 달리 우리들은 그렇게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과는 달리, 엉뚱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엉뚱한 모습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특별한 예외도 허락하는 이기적인 욕심까지도 간직하게 만들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왜 일꾼이 적을까요? 그 일꾼을 단순히 사제나 수도자에 한정지으면 적을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사제나 수도자만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아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일꾼이 적다고 할까요?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지요.

바로 주님께 충실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인간들에게 충실하신 주님과는 달리, 자기에게만 충실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께 충실했을까요? 그래서 사랑을 전하라는 주님의 그 말씀을 얼마나 따랐을까요? 주님의 충실한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고, 얼굴이 부끄러워 집니다.


주님의 일꾼이 됩시다.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일꾼이…….



한 여인의 작은 헌신('좋은 생각' 중에서)


20세기가 시작되는 즈음에 보스턴 교외에 정신 지체아들과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시설이 있었다. 환자중에는 애니라는 이름의 한 꼬마소녀가 있었다. 직원들은 이 소녀를 도우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마침내 소녀는 지하에 있는 독방으로 옮겨졌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하던 한 그리스도인 여성은 모든 피조물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점심시간이 되면 책도 읽어주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나 소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담벼락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녀의 방으로 초코렛 접시를 가지러 왔던 이 여인은 접시에서 초코렛 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고, 2년만에 소녀는 이 시설을 떠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애니는 떠나지 않았고 그대로 남아서 자기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약 50년 후 영국 여왕이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여성에게 훈장을 수여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은 헬렌 켈러였다. 맹인과 농아 두 가지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만일 설리반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에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헬렌 켈러를 끈기있게 사랑하고 돌봐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 옛날의 꼬마 애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