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영성의 향기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와 영성-6

ohjulia 2006. 10. 26. 11:26

4.4. 영의 정화

4.4.1. 영의 능동적 정화

환시나 계시, 그 밖의 천상 사정에 관한 감미로움은 영성 생활을 하는 이들의 관심사이지만 이 모든 것도 가장 작은 겸손한 행동과는 비길 수 없다. 왜냐하면 겸손은 애덕과 같은 결과를 갖고 있어서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선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잠언 317.

묵상 안에서 축적되어 왔고 또한 관상의 출발점이기도한 ‘예수께 대한 사랑’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일치의 길에서 새로운 한 걸음을 재빨리 내딛게 한다. 감각의 정화가 영혼 안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정적인 면에서의 이탈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 즉 영적으로 하느님께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 -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의 능동적 정화’ 혹은 ‘영의 능동적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대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세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성과 기억과 의지이다. 영의 정화는 이 세 가지 능력들로 하여금 세 가지 대신덕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영의 정화란 결국, 이성으로 하여금 신덕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하게 하고, 기억으로 하여금 망덕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원하게 하며, 의지로 하여금 애덕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다. 영의 정화란 인간의 이성과 기억과 의지를 대신덕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가르멜수도회 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입문』, 서울, 크리스챤출판사, 1991, p.184.


4.4.1.1. 이성의 정화

이 어두운 밤이란 무지와 불완전에서 정화시키는 것이다. 밤 2권 5장, 1.


피조물은 본질상 하느님과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를 매개로 이성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다. 즉 이 세상에 상상력이 미치고 이성의 능력이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이성은 관념과 지식을 자연적 지각과 초자연적인 감각적 지각, 그리고 영적지각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한다.
① 자연적 지각 - 자연적인 방법으로 외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지식이나 지각은 ‘감각의 밤’을 통하여 정화된다. 내관에 의해 얻는 자연적 지각이나 지식은 ‘지성의 밤’을 통하여 깨끗이 비워져야 하지만, 초심자에게는 내관의 작용을 통한 추리와 묵상이 필요하다.
② 초자연적인 감각적 지각 -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외관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각과 지식 역시 하느님과 합일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영혼이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영혼 안에서 오류와 교만과 허영이 잘 자라나는 바탕을 마련해주게 되고, 결국 하느님과 합일의 방법인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앙을 가장 힘없게 하는 것이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든지 언제나 지워없애는 것이 상책이다. 하느님은 겸손하고 애착이 없는 영혼에게 더욱 맑고 뛰어난 은혜를 내리신다.
③ 영적 지각 - 분명하고 개별적인 영적 지각들은 육체의 외관이나 내관이 매개가 전혀 없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영혼에게 밝고 또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지각에는 시현, 계시, 영어, 영적 감동이 있다 ; 산길 2권 10장 참조.
이성이 가지는 지식이나 관념은 정화되지 않을 때 하느님과의 합일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느님께 도달하려면 무지로 가야 하고, 하느님의 빛에 바짝 다가서려면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성이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신덕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신덕은 이성을 어둡게 하고 비게 함으로써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또 신적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이성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성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알맞게 되려면 감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워야 하고, 고요 잔잔한 이성 안에 또렷이 비치는 것까지를 모두 벗어 던져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적절하고도 직접적인 오직 하나의 방법인 믿음 안에만 있어야 한다. 산길 2권 9장, 1.


4.4.1.2. 기억의 정화

흔들림 없는 망덕은 하느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의 합일에 이르려면 오로지 희망으로써만 의지하여 나아가야 한다. 희망 없는 영혼은 아무것도 차지할 수 없다. 잠언 37.


기억은 좋고 나쁜 모든 종류의 지식을 축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중심자리가 된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억(망덕)은 영혼으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에서 이탈하여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원리로 망덕이 기억을 정화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기억이 망덕으로 하느님과 합일하게 위해서는 지각을 철저히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술에 나타난 사상체제를 볼 때 이 교설은 이미 영성생활에 어느 정도 발전한 영혼들을 위한 것으로 기억의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주관하심에 전적으로 순응하려는 자세를 전제로 하고 있다. 초심자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능력인 이성과 기억 그리고 의지를 통해서 묵상을 준비하고 실철할 필요가 있다; 산길 3권 2장, 1 참조.

기억의 정화는 망덕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색에 대한 기억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으로 우리 영혼을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강렬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의 비움은 완전해야 한다. 영혼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연과 초자연의 지각을 용납하지 않고 그 바닥까지 부정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큰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기억은 오직 최고 선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커다란 망각 속에 남게 된다. 산길 3권 2장, 4.

기억의 정화도 이성의 정화와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감각적 이미지를 잊게 하여 자신을 텅비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희망은 여러 가지 시련과 방으로 상징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서히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은 ‘활동적인 기억’이라고 하는 훈련과는 대조적이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신앙으로 회심하기 전에는 온갖 것을 부인하고 털어내어 텅텅 비울 필요가 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즉 이승의 온갖 사건, 온갖 만남에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영향을 끼치는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운 감탄을 계속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조 : 호안 가렡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 pp.69-70.

4.4.1.3. 의지의 정화

<하느님의 意志는 우리들의 平和로다> 이 말은 언제나 나의 삶을 위한 것이지만 죽음을 위해서 더욱 적절한 말이기도 하다. 요한 23세가 몽말뜨르 갈멜 수녀원에서 피정 중에; Pope John 23, 『靈魂의 日記』, 박양운 역, 서울, 갑진문화사, 1965, p.254.


영혼의 힘은 그 기능과 감정과 욕구에 있고 이 모든 것은 의지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의지가 이 기능과 욕구를 하느님게 향하도록 하고 하느님 아닌 것에서 빗나가게 하면 그 때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힘을 간직하는 때이니 바야흐로 영혼은 모든 힘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산길 3권 16장, 2.

이성을 정화시켜 믿음을 견고케 하고 기억을 정화시켜 망덕에 뿌리를 박게 한다면 의지의 정화를 통해선 애덕을 꽃피운다. 이성과 기억을 정화하는 것이 이 밤에서 대단히 중요지만 의지의 정화는 두 가지 정화의 뜻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신덕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도토리 안에 떡갈나무 잎과 가지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이 사랑인 은총 안에는 모든 미덕이 숨겨진 채 잠재되어 있다. 도토리가 된다는 것은 떡갈나무가 되기를 자원함이다.” Thomas Merton, 『고독 속의 명상』, 장은명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3, p.27.
사랑이 있어야 신덕으로 한 일이 큰 가치를 지니게 되고 사랑을 통한 의지로써 진정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5)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지의 정화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는, 그것이 감각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모두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까지 완전히 끊어버려야 하는데에 더욱 큰 고통이 따른다.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영혼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써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이 때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정화된 사랑이다.

“정이 재갈을 벗으면 온갖 악덕과 불완전이 이에서 나오고 한편 제대로 고루어지면 온갖 덕이 이에서 나오게 된다. 그런즉 영성의 길을 걷는 사람아, 그대는 깨달으라, 어디든 정 하나가 있는 곳에 영혼의 모든 것이 따라가는 법, 의지와 다른 기능이 모두 그 정에 사로잡혀 사나니, 나머지 정 세가지도 정 하나의 안에 살며 항쇄족쇄로 영혼을 괴롭히리니, 감미로운 관상과 합일의 자유 및 안식을 향해 영혼이 날지 못하게 하리라.” 산길 3권 16장, 5.


이처럼 이성, 기억, 의지의 세기능에 상응하는 믿음, 희망, 사랑의 대신덕은 영혼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우고 캄캄하게 만든다. 그래서 철저하게 비우면 비울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게 된다. 이처럼 성인의 영성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요구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을 준비할 줄 알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또 그 은총이 피어나도록 노력해야 함을 전제한다.

4.4.2. 영의 수동적 정화 참조 : 가르멜수도회 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입문』, 서울, 크리스챤출판사, 1991, pp.160-164.

감각의 밤을 지나 영성의 능동적 밤을 거쳐서 다다르게 되는 지역이 바로 영의 수동적 밤이다. 그러나 “감각의 첫 번째 정화와 밤의 메마름과 고생을 벗어나자 즉시 이 영의 밤에 드는 것이 아니다.” 밤 2권 1장, 1.

성 요한은 영의 능동적 밤 다음에 오는 이 상태를 자신의 첫 어둔밤에서 구체적으로 영의 수동적 밤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이 시기가 하느님과의 일치 직전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의 수동적 밤임을 알 수 있다.
또 성인은 세 가지 밤을 언급하면서, 세 번째 밤은 종착점인 하느님 자신이 밤의 원이이라고 했다. 참조 : 산길 1권 2장.
영의 수동적 밤은 이성과 기억 그리고 의지의 정화인 영의 능동적 밤과는 달리 하느님을 닮기 직전에 나타나는 밤이라 하겠다.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고 순수 맑음이시기 때문에 영혼이 변모하기 위해 더 큰 정화의 필요성이 야기된다. 따라서 이 관상은 영혼에게 밤일 뿐 아니라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성인은 말했다. 그리고 이 밤이 수동적 밤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 고통과 괴로움이 하느님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성령의 지혜를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환히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영혼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깨달음은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고 아픔인 것이다.
밤 자체 모두가 다 고통이겠지만 영의 수동적 밤에서 당하는 고통은 여타의 고통을 능가하는 큰 고통이다. 그래서 성 요한도 이 고통을 다른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밤에서 당하는 고통을 성인은 어둔밤에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이 관상의 빛과 지혜가 매우 밝고 맑은 반면 빛을 받는 영혼은 어둡고 불결하다함은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밝은 빛이 쏘아 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밤 2권 5장, 5.
“둘째, 영혼이 그의 자연적, 영성적 약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신령한 관상이 영혼을 굳세게 만들고 휘어잡을 양으로 하나의 폭력을 쓰는 까닭인데 가뜩이나 약해서 괴로운데다가 더구나 호된 힘이 쏘아 붙일 경우이면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 밤 2권 5장, 1.
“이 영의 밤에 당하는 다른 고통은 의지의 고통과 마음 죄로 오는 고통으로서 때로는 갑자기 죄악의 기억이 새로워짐과 동시에 구원의 길이 막연하다는 생각을 사무치게 한다.” 밤 2권 7장, 1.
“또 다른 하나는 이 어두운 밤이 영혼의 능력과 애착을 묶어 놓은만큼 그 결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릴 수가 없고 빌 수조차 없는 그것이다.” 밤 2권 8장, 1.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영의 수동적 밤을 고통과 아픔으로 표현하면서 그 밤이 영을 어둡게 할지라도 이 어두움이 영혼을 비추고 빛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밤은 복된 밤이며 이 밤이 가져다 주는 것도 긍정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성인에 의하면 이 어둔밤은 어머니의 산고와 같은 것임을 느끼게 한다. 즉 산고 없이 귀여운 아기를 가질 수 없듯이 이 정화의 아픔 없이는 영성의 참다운 맛은 있을 수 없고 하느님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밤이라고 할 수 있는 영의 수동적 밤은 자기가 아는 죄뿐 아니라 영혼 자신이 모르는 때까지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일곱 번 닦인 순은처럼 순수해지지 않을 경우 결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영혼이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이 한계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참조 : 밤 2권 2장, 1.

성인의 이러한 설명은 하느님의 빛과 사랑이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완전한 밝음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들어가기 위해, 빛 때문에 장님이 되고 사랑의 아픔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는 고통과 아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적 정화가 시작되는 처음에 신비스러운 이 불이 하는 일은 영혼의 나무를 뜨겁게 하기보다는 그저 말리고 준비시키는 일이다. 허나 이미 시간이 가고 이 불이 영혼을 뜨겁게 해 주었을 때면 타는 사랑의 열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밤 2권 12장, 5.
그리고 신비로운 깨달음이 빛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 깨달음은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기쁜 고요와 맑음을 가지고 더러는 이런 모양으로 또 더러는 저런 모양으로 하느님을 느끼게 된다.” 밤 2권 13장, 1.
그리고 “이 빛이 의지마저 한꺼번에 다치게 하여서 사랑은 높고 부드럽고 세차게 불붙는다.” 밤 2권 13장, 2.

이상에서 정화의 단계에 대해 살펴 보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이후의 합일에 관해서는 <영혼의 노래>와 <사랑의 산 불꽃>에서 다루고 있다. 합일은 정화를 통한 신앙의 목적이며, 충만한 사랑의 삶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아니 자신을 온전히 불꽃에 내맡겨 태워버리고 불꽃과 하나됨으로 사랑의 분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극히 순결한 영혼은 바깥 일에 머물거나 세상의 비평 소리에 동요되지 않고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은 채 온갖 것을 떠나 오로지 깊은 내면의 고독에로 물러가 감미로운 쉼 중에 하느님과 친교를 이룹니다. 신적 인식으로써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십자가의 성 요한, 『잠언과 영적 권고』,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p.122.

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속에
부드러이 살라 주는
사랑의 산 불꽃이여
다시는 너 매정할 리 없으니
자 이만 끝내어 다오 소원이로다
녹아나는 이 만남의 휘장을 찢어 다오

- ‘사랑의 산 불꽃’ 중에서

 

**에밀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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