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요사팟 (11월 12일) 주교 , 순교자

ohjulia 2006. 11. 12. 02:13
 성 요사팟
 

    성 요사팟 (St.Josaphat) 주교 ,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성인의 활동연도 : 1584-1623년 성인과 같은이름 : 요사파트 요한 쿤체빅(Joannes Kuncevyc)은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1584년에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부모의 가업을 잇기 위해 상업을 배우러 빌나(Vilna)의 포포빅 (Popovyc)이라는 사람의 도제로 보내졌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주인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빌나에 있는 바실리우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성 요사팟은 1609년에 비잔틴 전례에 따라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즉시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그의 친구 룻스키는 삼위일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그는 러시아 비텝스크(Vitebsk)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폴로츠크(Polotsk)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하여 시노드(Synod)를 소집하여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텝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에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하여 살해되어 다비나 강에 수장되었다. 그는 첫 번째 동방 교회 성인으로서 ‘일치의 사도’라 불리며, 164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 폴란드의 볼리니아 지방 블라드미르에서 태어난 요한 쿤세비크(1580-1623년)는 청년 시절에 어느 상인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터 그는 주인의 놀라운 제안을 뿌리치고, 1604년에 성 바실리오의 우크라이니아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고, 요사팟이란 이름을 받았다. 그후 그는 1609년 비잔틴 예식에 따른 사제로 축성되었는데, 그의 탁월한 설교가 큰 명성을 얻게 했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 사이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인물이 되었다. 1617년, 그는 러시아의 비텝스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그 얼마 후에 플롯스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하였으니,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하여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사제이며, 로마 카톨릭은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 주교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는데,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비텝스크로 사목방문을 하던 중에 몹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어 다비나강에 수장되었다. 성 요사팟은 첫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1867(1876)년에 시성되어 서방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계신다. **************************************************************************** 1967년, 신문에 실린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희랍 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포옹하는 사진은 9세기 동안이나 갈라져 있던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중요한 단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1595년, 오늘의 성인이 소년이었을 때 리투아니아에 있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명한 곳)의 희랍 정교회 주교와 수백만의 루테니아 인들을 대표하는 5명의 다른 주교들은 로마와의 일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요한 쿤세비치-요사팟은 그가 수도원에서 받은 이름-도 같은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고 죽을 때까지 고생하였다. 당시에 폴란드였던 곳에서 태어난 그는 일을 하기 위해 윌노로갔으며 브레스트의 회의에 동조하는 성직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바실리오회의 수도자가 된 후에 사제가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설교자와 고행자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비텝스크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때 그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전례와 관습에 간섭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로마와의 일치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사팟은 교회 회의와 교리 교육,성직자들의 재교육, 자신의 표양 등으로 리투아니아에 있는 대부분의 희랍 정교회를 일치에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에 파벌적인 교계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요사팟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사팟이 ’라틴화’되어 그의 모든 신자들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의 라틴 주교들에게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비텝스크로 갔다. 혼란을 야기시켜 요사팟을 주교좌에서 쫓아내려는 음모가 꾸며져 있었다. 사제 한 사람이 바로 요사팟의 집 정원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도록 파견되었다. 요사팟이 그를 물리치고 자기 집 문을 닫았을 때 반대자들은 시청의 종을 울렸고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제는 집에서 나갔지만 몇몇 군중들은 주교관으로 쳐들어왔다. 도끼창에 찍혀 머리가 터지고 총에 맞은 요사팟의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나중에 그의 유해는 오늘날 폴란드의 비알라에 안장되었다. 그는 동방 교회에서 최초로 시성된 성인이다. 그의 죽음은 가톨릭 정신과 일치에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가져왔지만 이단과 분열도 계속되었으며 그에 따른 순교자들도 생겼다. 폴란드의 분할 이후에 러시아는 강제로 대부분의 루테니아 교회를 러시아 정교회와 합치시켰다. 분열의 씨앗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질 때인 4세기에 이미 뿌려졌다. 현실적인 분열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관습-누룩넣지 않은 빵의 사용,토요일의 단식, 독신제-에서 시작되었다. 양편 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관여가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교리적인 차이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든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비극적인 분열-로마 가톨릭 교회가 64퍼센트,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대부분이 희랍 정교회)가 13퍼센트,개신교가 23퍼센트- 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계의 71퍼센트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적 일치의 증거를 보아야만 하는 때에 보여준 안타까운 현상이다. 분노한 군중들에 둘러싸인 요사팟 주교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비텝스크의 시민 여러분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은 거리에서도, 다리 위에서도, 도로에서도, 시장에서도, 도처에서 나를 해치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에 목자로서 있으며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