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술피치오 세베로 (Saint Sulpicius Severus) 주교
성인의 활동지역 : 부르주(Bourges)
성인의 활동연도 : +59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술피치우스, 술피키오, 술피키우스
술피치오는 '로마의 한 부족'의 이름이었다.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져 있지만,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가 그를 프랑스 부르주의 주교로 임명했으며, 585년의 마콩 공의회에 참석한 것은 확실하다.
‘세베루스’(Severus)란 별명은 부르주의 또 다른 성 술피키우스 주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나중에 붙여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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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
(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 (Gennadius, +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
(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 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겐나디우스는 성 술피키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
그 당시의 저자들이 성 술피키우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부르주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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