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베드로 다미아니 (2월 21일) 추기경 , 교회학자

ohjulia 2007. 2. 21. 08:13
 성 베드로 다미아니
 

    성 베드로 다미아니 (Saint Peter Damiani)

    추기경 ,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오스티아(Ostia) 성인의 활동연도 : 1001-1072년 성인과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 (Petrus Damiani)는 어릴 때에 고아가 되어 형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형은 라벤나의 사제였는데, 그에게 다미아누스(Damianus)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파르마(Parma)로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교수가 되었으며 1035년에는 베네딕토회 회원이 되었지만 자신은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이 된 그는 은둔소를 다섯 군데나 더 세웠다. 그는 특히 이 세상을 초탈한 인물로 또 성직매매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1057년 그는 교황 스테파누스 9세(Stephanus IX)로부터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수도자의 위치로 돌아온 그는 주로 교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대립교황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연옥, 성체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하여 사제들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즉시 그에 대한 지역교회의 공경이 시작되었고, 1823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며 보편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의 빛을 비추시오"(마태 5,14-16)라고 말씀하셨는데, 중세기의 유명한 교부 성베드로 다미아노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열렬한 신앙과 광대한 지식으로서 냉담과 불신의 암흑에 헤매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횃불과 같이 비추고 또한 올바른 길을 표시해 준 ’세상의 빛’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006년 이탈리아 라벤나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때 이미 양친을 여의고 처음에는 맏형의 집에서 양육되었지만, 이 사람은 가혹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베드로를 야비하게 대했다. 사제직에 있던 둘째형이 이를 보다 못해 자기가 맡아 사랑으로써 양육하는 한편 친히 초등교육을 베풀었다. 그러는 동안 베드로가 세상에서 드문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충분히 발휘시키기 위해 동생을 대학에까지 보냈다. 베드로는 둘째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밤낮 열심히 공부해 대단히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영신에 관해서도 매우 예민한 그는 일찍부터 세속의 명예가 구름과 같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떠한 출세도 할 수 있을 만큼 양양하던 장래를 자기 스스로 포기하고 파엔자 시에서 가까운 산중에 들어가서 작은 초막을 짓고 오로지 기도와 고행으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민가와 세속을 떠나 대자연 속에 살게 된 그는 더욱 성령의 은혜를 받아 점점 더 영신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더 열렬한 신앙을 간직하게 되어, 그의 고신 극기의 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본래 겸손한 그는 자기 덕행의 빛을 남 앞에 드러내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지만, 숨기는 것보다 더 드러난다는 비유와 같이 성인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사방에 퍼졌다. 그래서 그의 덕망을 사모하여 교훈을 받으러 오는 이가 날로 증가했다. 그 중에도 베네딕토회 대수도원장은 자기 수도원 내부의 개혁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을 간청하고, 뒤에는 교황까지조 베드로의 인격과 식견(識見)등을 중히 생각하고 교회 신앙의 수호를 의뢰하게 될 정도였다. 그 당시 교회는 슬프게도 규율이 문란해져, 냉담적인 풍조는 신자들간에는 물론, 수도자, 성직자 계급까지도 침입해 성직매매의 폐풍이 사방에서 행해졌고, 사제도 동정을 지키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교황의 청을 들어 이러한 풍기의 숙청에 헌신한 베드로는 옛적 성 요한 세례자와 같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제국을 순회하며 불을 토할 듯한 강론과 엄격한 자기 생활의 모범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들의 마음에 다시 신앙의 거룩한 불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클레멘스, 레오, 스테파노, 니콜라오 등 교황이 그를 교회 부흥의 대 은인으로서 존경하고, 또한 독일황제 헨리코 3세가 성인과 서신으로 연락하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즐거워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특별히 스테파노 교황과 같은 이는 그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1057년 그를 오스티아 추기경의 영직에 오르게 했다. 겸손한 베드로는 재삼 이를 사양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마침내 그 직을 받고나서 책임이 점점 더 중대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배로 열심을 분발해 갱신 사업에 노력했다. 그것으로 인해 일부 인사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은 일도 종종 있었지만, 본래 그런것에 개의치 않던 그는 다만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분투 노력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정결한 마음을 가진 그의 활동이 얼마나 풍부한 결실을 냈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노경(老境)에 들어선 베드로는 일체의 활동을 떠나 평소에 원하던 기도 생활로 돌아가 고요히 선종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이 원의는 알렉산데르 교황때 이루어졌으니 한가한 몸이 되어서도 교회를 위해 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그것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대 회의에 교황 사절로서 참석하고 중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1072년 회의를 마치고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도중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전의 위대한 공로에 대한 상을 받기 위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연옥, 성제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해 사제들에 관한 내용이 많다.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 박사로 선언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