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3월 18일) 주교 학자

ohjulia 2007. 3. 18. 04:38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St. Cyril) 주교 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성인의 활동연도 : 315-386년 성인과 같은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같은 치릴로로 총주교이며 교회 학자로 부르는 성인이 두분이다. 이들은 같은 4세기에 태어나 아리우스파의 이단자들로 인해 고생을 하면서도 그들의 그릇된 설과 싸운 사람이지만 한 분은 앞에서 말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이고 또 한 분은 지금 이야기할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이다. 치릴로는 315년경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20세까지는는 숨어서 종교연구에 전력을 다하고 성서는 물론 교부의 저서 등도 모조리 연구하는 한편, 이단설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하여 점점 교회가 진리란 것을 깨달았다. 19세때에 예루살렘의 주교 막시무스에게 선택되어 부제가 되고 나서는 신자들에게 강론도 하고 구도자를 인도하기도 했지만, 그 가르치는 방법이 얼마나 깊이가 있었던가는 구도자를 위해 서술한 저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치릴로는 부제로서 10년을 지낸후 비로소 사제가 되고, 다시 5년 뒤에는 막시무스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전 그리스도교회의 모(母) 교회라고 인정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총주교가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명예라기보다 오히려 고통의 원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로 말미암아 그는 아리우스파의 이단자들의 박해의 목표가 되어 전후 3차례나 총주교좌로부터 추방당하고 35년간의 주교생활 중 16년은 유배지(流配地)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추방의 원인이 된 것은 "치릴로는 성당의 기구를 모조리 매각 처분했다" 라는 반대자의 비난이었다. 치릴로는 언젠가 대 흉년 때 빈민들에게 식량을 사서 나누어 주기 위해 전례 (典禮)에 필요치 않은 성구(聖具)를 매각해 돈으로 바꾼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빈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에게는 별로 진기한 일이 아니겠지만, 사랑의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단자들은 이를 기회로 신성 모독적인 행위처럼 과장해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죄인을 불쌍히 여기며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 주 예수를 비난한 바리사인들의 행동과 흡사했던 것이다. 치릴로는 귀양가서도 결코 무익하게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자기 교구의 신자 일동을 위해 기도하고 덕행을 닦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성서와 성전을 기초로 하여 교우들에게 신앙의 참된 교리를 설명하는 설교집도 이러한 때에 저술된 것이다. 그가 아직 예루살렘의 주교로서 있을 때의 일이다. 확실히 기적이라고 인정할만한 두 현상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351년에 5월 7일 오전 9시경 갈바리아에서 올리브 산까지 약 10리 가량에 걸쳐 하늘에 커다란 십자가 모상이 나타나 태양광채보다 더 강한 빛을 발한 사건인데 그로 인해 신자들은 깊은 위안을 받고 미신자들을 감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고 한다. 그 자세한 것은 치릴로가 콘스탄시오(Constantius)황제에게 보낸 서간 중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 정교회는 지금도 5월 7일에 그 기적을 기념한다고 한다. 다른 또 하나의 기적은 더 위대한 것으로서, 배교자 율리아노(Julianus)황제가 그 리스도교는 진리가 아니란 것을 입증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 즉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르 13, 2) 하신 말씀이 성취되지 않기 위해 69년 디도(Titus) 장군의 지휘하에 그의 군대로 하여금 완전히 파괴된 궁전을 재건하려고 결심했던 때의 일이다. 황제의 원조를 몹시 기뻐한 유다인들은 폐허로 변한 자리를 차차 정리하며 막상 재건에 착수하려고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모두 주 예수의 예언이 헛되게 되지난 않을까 하고 매우 염려했다. 이때에 치릴로 주교는 "천지는 변할지라도 내 말은 변치 않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열심히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기초 돌을 놓기 위해 땅을 파노라니 별안간 땅속에서 굉장한 화염이 솟아올라 어떤 사람은 타죽고 어떤 사람은 큰 화상을 입은 후에도 몇번이나 이 같은 재앙을 당한 나머지 끝내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쁨은 중천에 달했다. 교회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릴로를 위시하여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목전의 사실에 점차 신앙을 견고히 하며 충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것은 당시 이교의 역사가까지도 자기네 저서에 기록한 유명한 기적이다. 그 뒤 치릴로는 67세 때 381년 콘스탄티노플(Aecumenicum Constinopolitanum)에서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고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의 이단에 대해 성령께서도 성부, 성자와 같이 하느님이시란 것을 의결(議決)했다. 사실 치릴로는 성서 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347년의 사순절 동안 실시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이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이다. 그는 386년 72세를 일기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1882년,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예루살렘의∼(C. Hierosolymitanus, 315?∼397)성인. 주교(349∼387). 교회학자.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소년기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349년 막시모(Maximus)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체사레아의 주교인 아리안파의 아카치오(Accacius)로부터 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랫동안 아리안파 또는 반(半)아리안파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후기학자들의 증언과 치릴로 자신의 저술과 생활로 해명되고 풀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오히려 아리안파인 아카치오와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357년,360년,367∼378)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387년 3월 18일이 사망일로 추정되어 이날을 축일로 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중에는 ≪예비자교리≫가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예비자들과 새 영세자들을 위한 일종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또한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인 성부나 성자의 본체적 일치 또는 동체성 (consubstantialtus)를 고백하여 아리안파의 양자설(養子說)을 배척했으며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를 성신께 연결시켜 성삼교리의 설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347년의 사순절 동안 사용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서가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였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