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장 19-23절
“성령을 받아라.”
<샘물 같으신 분, 성령>
성령의 역사(役事)가 특별한 사람 안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활동이 특별한 모임이나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평범한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티격태격, 삐거덕거리는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현존하십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그래서 조금은 지루한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계십니다.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틈만 나면 철야기도를 다니는 것일까요?
수시로 금식 대피정을 떠나는 것일까요?
‘기도빨’이 센 분으로부터 자주 안수를 받고 그 기운에 팍팍 쓰러지는 것일까요?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치유의 은총을 입어 200살까지 사는 것일까요?
그런 모습도 필요하지만, 성령께서는 요란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성령의 활동은 부산스럽지 않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신앙인, 오늘 비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좀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의 내면 안에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분이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때도 성령의 현존을 느낍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남도 평야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 한가운데 웃고 계시는 성령,
넓은 강물 위로 부서지는 금빛 햇살 안에 미소 짓고 계시는 성령, 유채꽃이
흐드러진 강변을 거닐고 계시는 성령, 고된 하루 일과를 마무리 짓고 환한 얼굴로
땀을 닦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성령...
성령은 샘물 같은 존재이십니다.
샘물은 물을 긷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 솟아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지 않고,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분을 늘 우리 안에서
흘러넘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을 그릇에 담을 때 비로소 그 샘물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되듯이,
우리의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것이며 성령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사랑은 성령의 무한한 사랑 안에 접목된 후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면서 바라보시며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면서 바라보게 됨을 기억하길 바랍니다(샤를르 드 푸코 신부).
성령 안에 살고 싶으십니까? 성령의 움직임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고요하게 자신의 삶을 정지시켜보십시오.
하느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보십시오.
성령의 빛을 빨리 받으려고 조급해하지도 마십시오.
하느님은 자주 말없이 말씀하십니다.
인내하고 인내한다면 적당한 순간에 성령께서 빛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조용하신 분이십니다.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흰 비둘기처럼 가까이 다가오시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도망가십니다.
반대로 가만있으면 다가오십니다.
순풍이 불면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사람, 그분께서 활동하시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편안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도서를 손에 들것입니다.
성령께서 24시간 내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성령께서 시시각각 우리를 위해 배려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성령께서 순간순간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오늘 성령께서는 굳게 닫힌 우리 마음 안의 다락방을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우리 각자를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를 향해 사랑과 용기의 기운이 되시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받으십시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님
Ave Verum Corpus KV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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