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모어 (St. Thomas More) 인본주의자 ,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478-1535년
성인과 같은이름 : 도마, 모어, 토머스
인간은 보통 선뜻 눈에 띄는 공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는 초자연적 성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겸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그런 이는 물론 세인의 갈채와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하려는 성 토마스 모어가 바로 이 같은 분이다.
그는 1480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그 당시 재산의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슬하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 자연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도 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가끔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 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곧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어,
불과 25세라는 약관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그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해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그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 신부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그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하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즉 요안나는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 토마스는 다시 과부인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의 가정은 신심생활의 거울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있어 모범이 되어 매일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식사때에도 성서 구절을 낭독하고 처자와 더불어 성서에 대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친절을 베풀었던지, 사방에서 찾아든 손님들로 집안이 들끓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손님도 많이 끼어있었다고 한다.
첼시에 별장을 둔 후부터는 더욱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토마스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 마침내 대심원장이라는 중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프랑스와의 화친 문제등 기타 여러가지
중책을 맡겼으며, 그때마다 그는 대 성공리에 책임을 완수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를 더욱 더 믿게 되어 1529년 10월에는 그를 재상직에 올려 주었다.
본래 겸허한 토마스는 그 같은 고위 영직을 탐하지 않았으나 국왕의 명이므로 그를
받들어 그 선정에 적극 조력했다.
다음은 그가 대심원장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중대한 사건의 결심판결에 앞서 일개 판사에 불과한 노부(老父)앞에 꿇어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책임감에 충실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람이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평신도 지도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토마스 모어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생명을 바쳤다.
1535년 7월 6일, 런던탑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영국 교회의 창설을 끈질기게 부인했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린 모어는 문학자이며 뛰어난 법률가로서, 신사였으며
네 아이의 아버지로 영국의 수상이었다.
훌륭한 영적 인물이었던 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이혼한 왕의 처사를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면서 런던탑에 갇혀 있었다.
그 반역죄란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은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계의 공의회를 알고 있지만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오직 한 나라의 공의회뿐"이라고 단언했다.
400년 후인 1935년에 토마스 모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인물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몇몇 성인들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외교관이며 조언자였던 그는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충절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헨리8세 자신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는 토마스 모어란 인물이 신중한 사람이며 그의 인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상인 그를 자기 편에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토마스가 수상직을 사임하자 헨리 8세는 그를 없애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눈가리개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처형대의 받침 위에서-그것은 단순한 나무토막이었다-자기 머리를
쳐들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농담을 했다.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수염을 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도끼가 천천히 들려 올라가서 잠깐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테오도르 메이나르, "영웅 인문주의자")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는 122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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