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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는 기도'', ''드리지 않는 기도''
기도는 무엇이 합당한 가를 하느님께 묻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 마음의 영을 열어 들어 높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대화입니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면 내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첫째 청원이고
둘째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끝으로 대화입니다.
바실리오 성인도 기도는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닛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마음을 들어올리는 것이며,
영성가 에바그리오는 하느님께 우리 마음의 영을 들어올리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대화라고 기도를 말합니다.
아오스딩 성인도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의 우정 관계를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7세기 요한 클리마쿠스는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기도는 내가 하느님께 드리는 능동적인 외향적 기도입니다.
즉 내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제 내가 드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게 다가 오시는 기도(?)를 느낄 수 있는
내면의 기도를 봅시다.
기도란 말하는 것, 얘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말하지 않는 것, 침묵 가운데 하느님 안에 마음을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하느님 안에 젖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저 나는 침묵하고 마음을 비우며, 묵묵히 몸을 맡기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분이 기도하십니다.
불교적 기독교, 기독교적 불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자기 스스로 자력적으로 깨닮음을 얻고,
기독교 즉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깨닮음을 얻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연 종교이고 기독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고 문익환 목사님이 감방에서 염주 하나를 주어들고 나와
미래의 한국인의 과제는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라고 말했습니다.
불교의 석지명 스님도 일천 육백년 동안 한국민과 함께 해온 불교에서
한국혼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서양에서 과학과 국가 권력을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에,
조직력과 중앙 집중력이 있는 기독교의 모습에서
새로운 행동적 힘을 얻을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 신자 소설가 최인호씨도 불교에 묻어 있는 동양 정신의 심오함과
기독교에 묻어 있는 서양 정신의 집합력이 조화를 이루면 좋겠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불교는 자기가 드리는 기도와 수행(염불, 독경, 참선, 지관법)이 있고,
그리스도교는 성서에서 보면 내가 하느님을 찾고 기도드린다기 보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찾으시고,
다가오셔서 인간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도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으시지만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인간 이성이 또한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기도와 하느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기도가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그저 내가 드리는 기도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그저 입(염경기도)과 생각(묵상기도)으로 청원만을 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청원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늘나라의 큰 것을 청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적인 것은 덤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내가 드리는 기도요,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내가 드리지 않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느님과 통교하는 것을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리지 않는 기도’는 그저 가만히 하느님 앞에 묵묵히 앉아 있는 것,
가라 앉아 머무는 것, 비우는 것, 하느님 속에 잠들어 버리는 것,
즉 인간인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닌 기도, 무위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드리지 않는 기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 사상(헬레니즘)에서는 ’드리는 기도’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서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 위의 백성에게 내려오신다면,
그리스 사상의 하느님은 비 실재인 세상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순수 현실인 하느님께 이성을 통하여 파악되시는 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머리.묵상 기도)과 말(입.(염경 기도)로
입과 머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마음의 기도, 성체 조배)이며
그러한 기도가 현대에 많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데 마음을 편히 쉬게 해야 하지만
분심과 걱정 또한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란 생활 번민과 걱정 가운데서도 한층 더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에 여러 가지 번민은 오히려 기도의 양식이 됩니다.
바로 솔직한 기도가 됩니다.
’주님! 저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는 정말 피곤합니다.’
’주님, 저 형제를 미워합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진실한 기도를 하면,
그 기도는 이제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된 갈망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작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기가 어렵고,
대화하기에 너무 마음이 무겁고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저 마음을 비우고, 그저 솔직하고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
성령과 함께 하느님께 보여 드려 봅시다.
그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의 기도’(관상 기도) 드리지 않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능동 기도이고 ’내가 드리지 않는 기도’는 수동 기도입니다.
전자의 기도가 소리 기도(염경, 구송 기도), 묵상 기도이고,
후자는 관상 기도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능동과 수동이 교차되는 기도입니다.
저는 관상 기도를 위해서는 마음의 기도가 선행되야한다고 봅니다.
마음의 기도는 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우선 성체 조배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제 드리는 기도의 구송 기도부터 드리지 않는 관상 기도까지의 여정을
함께 걸어 가봅시다.
지금까지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갑시다.
- 곽 승룡 비오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기도
내 주여,
내 사랑의 품을 넓혀 주사,
내 마음의 입으로써 사랑에 맛들이고
또 사랑에 녹고
사랑에 목욕하게 하여 주소서.
크나큰 열정과 경이로써 나 자신을 초탈하고
사랑에 잡히게 하여 주소서.
사랑의 노래를 내가 부르면서
나의 사랑하는 주를 높은 곳까지 따르려 하며
내 영혼이 주를 찬미하고
사랑의 노래를 읊음으로써 맞도록 하소서.
나는 주를 나보다 더 사랑하려 하며,
나 자신은 주를 위하여만 사랑하려 하고,
주를 진실히 사랑하는 모든 일을
주 안에서만 사랑하려 하나이다.
이렇게 함은 주께로부터 발원(發源)하는 계명이
명하는 까닭이로소이다.
-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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