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ohjulia 2007. 12. 17. 14:31
2007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창세 49,1-2.8-10

그 무렵 1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2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 와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
8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목을 잡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복음 마태 1,1-17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죽을병에 걸린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돈만 생각했고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불릴 수 있을까를 죽는 순간까지 하고 있었지요. 드디어 임종의 순간,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목에 걸고 있는 끈에서 열쇠를 풀어 하녀를 손짓하여 불러서 자기 침대 옆에 있는 금고를 가리킵니다. 그리고는 말해요.

“저기 저 금고에서 큰 돈주머니를 꺼내 나의 관속에 넣어라. 알겠느냐?”

얼마 후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아주 훌륭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큰 식탁을 보았습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천사에게 “여보시오. 저기 저 연어는 얼마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천사는 “1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그러면 저 참치는요?”라고 물었습니다. “역시 1원입니다.”라고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부자는 신이 났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면 여기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는 “싸군, 모든 것이 굉장히 싸!”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 중에서 2원을 꺼내 천사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돈을 받지 않고 “당신은 인생에서 전혀 베푼 것이 없군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부자는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내 돈과 무슨 상관이 있소? 정 그렇다면 내가 10배의 가격을 내리다.”라면서 천사에게 20원을 내밀었습니다. 이에 천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천국에서는 누군가에게 선사했던 돈만 받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선사했던 돈이 없으니, 이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드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아직 가보지 않아서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 소외받는 사람과 함께 했던 예수님의 삶을 떠올려볼 때, 천국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실 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서 산 사람들과 계속 연결되고 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족보를 보게 됩니다. 내 족보도 아닌, 남의 족보 관심없다고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 안을 잘 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지요. 누구는 올바른 모습으로, 누구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을 족보를 통해서 우리들은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족보의 절정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과 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을 족보는 말합니다.

주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클레망소의 관용(‘행복한 동행’ 중에서)

1차 세계 대전 때의 일입니다. 유럽의 한 수상이 그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청년에게 저격을 당했습니다. 청년이 쏜 일곱 발의 총알 가운데 한 발을 맞은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요. 그러나 수상은 극구 청년의 사형 집행을 반대하며 대신 벌로 8년간 교도소에 수감시켜 사격 훈련을 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아니, 왜 하필 사격 훈련입니까?”

수상은 원래 의사였던지라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구나, 생각했던 사람들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의 물음에 수상은 처연히 이렇게 답했습니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에 일곱 발 중 한 발만 명중시킨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노린 적수를 관용과 용서를 넘어 진정한 자기 사람으로 품으려 했던 통 큰 인물. 바로 프랑스의 전 수상 클레망소입니다.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그에게, 세상은 ‘승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