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합시다.

ohjulia 2008. 7. 29. 15:15
2008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제1독서 요한 1서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지난주일 저녁 미사 때였습니다. 저는 주일의 마지막 미사를 하기 위해서 제의를 갈아입고 복사들과 입장을 했지요. 제대에 인사를 한 후, 신자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던 중 저는 갑자기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예식서 등 제대 위에 있는 책들 사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제가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찾는 것이 무엇이었냐면 바로 ‘미사 강론 원고’였지요.

사실 주일에 있는 각 시간 때의 미사마다 똑같은 내용의 강론을 하거든요. 따라서 하나의 원고를 가지고 새벽미사 때부터 저녁미사 때부터 똑같이 하기 때문에, 강론 원고를 전례예식서 맨 뒤에 끼워놓고서 미사 때마다 꺼내서 강론을 합니다. 그런데 그 강론 원고가 저녁 미사 때 사라진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리고 그 순간 제대를 준비하시는 분들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확 생기는 것입니다. 제대 미사 준비를 하면서 제 원고를 치웠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지요. 평소에도 원고를 잘 보지 않고 강론을 하지만, 강론 원고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더군요.

물론 강론은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없어진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네요. 청년 미사 중에 이루어진 청년들의 실수들, 결제 관련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사소한 일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넘어갈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지요. 지난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시간에 계속 연연함으로 인해서 지금이라는 시간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것이었지요.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로 복음도 마르타 성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으로, 글쎄 라자로가 병으로 그만 죽고 말지요. 하지만 마르타는 과거의 이 사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오빠 라자로이지만, 예수님께 원망을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굳은 믿음을 예수님께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이 고백은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굳게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이러한 고백을 주님께 할 수 있을까요? 자그마한 일에도 계속해서 연연하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과연 가능할까요?

좀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 마음을 굳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마음을 간직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합시다.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곁에는...(‘좋은 글’ 중에서)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머무르기를 좋아합니다.

지나치게 주관이 강하고 마음이
굳어있고 닫혀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고
열린 마음으로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그사람 가까이 있고 싶어 할것입니다.

다른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은 그 사람이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애써
주려고 하지 않아도 열린 마음으로

남의 말을 경청 하려 든다면 그 사람 곁에는
늘 사람들이 머물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 저 평지와 같은
마음이 되면 거기엔 더 이상
울타리가 없으며 벽도 없을 것입니다.

봄이 되면 넓디 넓은 들판엔 수많은 들꽃들이
각기 색깔이 다르지만 어울려서 잘들
살아가듯이 그렇게 열려 있는
마음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들판에 피어 있는 들꽃들은 여러 모양과
향기가 달라도 서로 시기하지 않으며
싸우려고 들지 않으며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것 처럼 열린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열린 마음은 강합니다.

나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 두십시요.
진정 강해지려면,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려면,

마음을 열고 끝없이 자신을 낮추십시요.

저 광활한 들판이 어떤 것과도 자리 다툼을
하지 않듯이 열린 마음에는
일체의 시비가 끼어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