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생각만의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람을 하도록 합시다.

ohjulia 2008. 10. 6. 04:38

2008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티아서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복음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좋은 김치가 되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더군요.

첫 번째 죽음은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요, 두 번째 죽음은 통배추가 칼로 두 쪽으로 갈라질 때요, 세 번째 죽음은 배추가 소금물에 절여질 때요, 네 번째 죽음은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될 때요. 마지막 다섯 번째 죽음은 그 배추가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익혀질 때까지 다시 한 번 죽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섯 번 죽을 때 비로소 김치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있겠지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죽음을 피하려 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으며, 죽음의 세계를 직접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서, 특히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교사가 던졌던 질문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까요? 율법 교사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율법 교사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방법을 모를까요? 우리 역시도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들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으로는 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준 사마리아인처럼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제는 머리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토록 얻고 싶어하는 영원한 생명이 그렇게 먼 곳에만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의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람을 하도록 합시다.



부끄러운 삶을 고치기 위하여(인터넷에서 퍼온 글)

며칠 전 일자산 아침 산책을 하는데 능선에 거의 다 갈 무렵쯤에 어떤 사람이 길가에 용변을 보고 흰 휴지를 사용하고 펼쳐놓은 듯이 버려서 얼른 둔에 뜨인다. 기분이 팍 상했다. 누가 용변을 보았으면 낙엽으로 덮어놓든가 휴지는 다른 곳에 밟아 놓든지 어찌 그리 얼른 눈에 띄게 펼쳐 놓았단 말인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지나갔다.

그 다음 날에도 그것은 있었다. 그곳에서는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지나가다가 보니 누가 말끔히 치웠다. 나는 삽이라도 있으면 내가 치우겠는데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어떻게든 치우겠다는 생각은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치웠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삽을 갖고 등산을 다닐 리는 만무하다. 그 사람도 막대기나 아니면 자기 손으로 직접 치웠는지 모른다.

그 분이 했을 일을 그려보며 내가 부끄러워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기분 상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지 않아도 된지 않는가. 그것을 치운 사람은 정말 착한 삶의 소유자이고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아침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국 앞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고 그 사이에 누가 술을 마시고 음식을 토해놓은 것이 보였다. 평상시 같으면 약국이 문을 열면 바로 치우겠지만, 오늘이 개천절 내일은 토요일 모래는 일요일 3일간은 약국이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면 저것이 3일 동안은 저렇게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산에 올라가서 다른 날처럼 몇 가지의 운동을 하고 내려오다가 보니 자동차는 가버렸고 그 토해놓은 것은 너무나 잘 보이게 되어 있다.

3일 동안 많은 사람의 기분을 잡치겠으니 나라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사무실 삽처럼 생긴 쓰레받기, 그리고 빗자루와 페트병에 수돗물을 하나 가득 받아서 자동차에 싣고 올라갔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이지만 세 가지를 들고 가야하고, 또 가족들과 식사할 시간도 되니까 가급적 빨리 해야겠기에 자동차에 실었다. 차를 그 앞에 세워놓고 쓰레받기를 대고 빗자루로 담아서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기에 거기에다가 담았다. 그리고 페트병의 물을 쏟아 빗자루로 쓸어내니 금방 말끔해 졌다.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부끄러운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고치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