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사랑의 신비^^*

ohjulia 2010. 5. 30. 02:21
♡ 사랑의 신비^^* ♡ (봉봉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 사랑의 신비^^*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주간은 생일잔치를 하느라 바쁘셨나요? 생일잔치를 못했다면 형제 자매님도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못하셨군요.... 형제 자매님, 무슨 일이든 우리가 축하할 일이 많으면 좋겠죠? 다음엔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가족끼리 서로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형제 자매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성호경을 바칩니다. 우리는 성호경을 바치면서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신앙인의 자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분명히 한 분이신데 세 위격으로 계신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교회의 대학자이신 아오스딩 성인이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를 한참하고 있을 때 바닷가에서 신비로운 일을 체험하고는 연구를 그만두고 “나는 믿기 위해서 알기를 원하지 않고 알기 위해서 믿기를 원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인은 하느님을 더 잘 믿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연구를 했었는데,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다 알아들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죠. 형제 자매님, 우리도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기 위해서 조금의 이해는 해야 되겠는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생각해 봤습니다. 형제 자매님은 사과를 보면 “아, 사과다”하고 압니다. 사과의 고유한 모양과 색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눈을 가리고 누가 여러분의 코앞에 사과를 갖다 대면 역시 “아, 사과다”하고 말합니다. 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았지만 사과의 향기를 맡으면 그것이 사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눈도 가리고 코도 막은 상태에서 누가 여러분의 입에 사과 한 조각을 넣어주면 그것을 씹어보고는 “아, 사과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과의 고유한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전혀 다른 것이 하나의 사과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만 가지고는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의 모양과 빛깔이다” 혹은 “사과의 향기다” 혹은 “사과의 맛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전체적으로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제가 어릴 때 큰집은 과수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팔 수 없는 상처가 있거나 좀 썩은 사과를 한 자루씩 주셨습니다. 그때는 사과가 아주 귀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귀한 손님이 오시면 대접하신다고 감춰두십니다. 어머니께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광에 감춰두셨지만 우리는 기가 막히게 찾아서 몰래 하나씩 꺼내 먹곤 했습니다. 냄새를 맡고 사과가 감춰진 곳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쌀독 안에서 깊이 묻힌 사과를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쌀에 깊이 묻어도 향기를 감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뵙지 못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어도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향기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축농증이나 심한 감기가 걸려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쌀독에 감춰진 사과를 찾을 수 없듯이 세상에 유행하는 병들, 예를 들면 이기주의 병, 황금만능주의 병, 건강지상주의 병 등에 걸리면 하느님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예,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홀로 서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성부와 성자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둘이 마주보고 있다고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면 뭔가를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 성자께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성자께서 아버지의 것을 받기만 한다면 그것은 성자 안에서 고여 썩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께서는 받은 것을 모두 돌려드립니다. 심지어 당신이 받으신 생명까지도. 그래서 두 분 사이에는 온전한 사랑이 넘쳐흐릅니다. 그래서 사랑의 향기가 피어납니다. 그 향기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세 분이 따로따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이시기에 한 분으로 계십니다. 형제 자매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와 나를 찾지 않습니다. 다만 둘을 묶어서 우리를 생각합니다. 참된 사랑으로 사는 가족 사이에도 아빠, 엄마 그리고 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나의 고유한 인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아빠는 아빠로 계시고 엄마는 엄마로 계시며 나는 나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사랑을 깊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향기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알지 못하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만 내 앞에 나타나시면, 예수님을 한 번만 뵐 수 있다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겠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형제 자매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제가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을 잘 사랑하십시오. 사랑할 사람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용서를 베풀고 정을 베풀고 따뜻함을 베풀고 무엇이든지 내가 가진 좋은 것은 다 베풀어 보십시오. 그러면 상대방도 바뀝니다. 상대방도 머지않아 그렇게 베풀게 됩니다. 나아가 함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게 되고 그를 함께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사자들은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들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느님 곧 사랑이십니다. 형제 자매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몰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기도드리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랑을 살기 시작합시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으로 살다보면 신비를 깨닫게 되고, 신비 자체를 뵙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습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의 잔치 곧 미사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또 그 미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먹여주십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그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사랑이신 아버지께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대구 신학교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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