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부르심

ohjulia 2010. 5. 14. 04:47




    <성 마티아 사도 축일>(2010. 5. 14. 금)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운 사도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는데,

    유일하게 마티아 사도만 사도들이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참 독특합니다.

    먼저 후보 두 명을 선발한 뒤에,

    (그 두 사람은 투표로 선발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모릅니다.)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해서 마티아를 사도로 뽑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납득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하여간에 최종 선택은 주님께서 하셨다는 뜻입니다.

     

    마티아 사도 축일을 맞아 성소, 하느님의 부르심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신학생들에게 성소가 있느냐, 없느냐? 를 식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되기 싫다면 규칙도 안 지킬 것이고 공부도 안 하겠지만,

    되고 싶다면 규칙도 잘 지킬 것이고 공부도 열심히 할 것입니다.

    능력, 성실성, 성격, 그 외의 항목들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글자 그대로 주님의 부르심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분명히 작용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코 5,18-19).”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가 되어서 따라 다니는 일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리는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만 성소가 아니고 결혼하는 것도 성소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부르셨는데 인간이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요나 예언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래도 요나는 도망가다가 다시 붙잡혀서 예언자로 일했지만,

    배반자 유다는 영영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인물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오로를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가 하겠다고 스스로 나섰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예언자로 파견하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하면서도 예언자로 일했습니다.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예레 20,9).”

    이것은 예레미야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예언자로서의 사명감이 그 자신을 불태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소를 인정하지 않고 쫓아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성소를 막지 못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모스 예언자가 양치기 출신이라고 멸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쫓아내려고 하고 박해를 할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아모스 7,14-15).”

     

    모세는 자기가 말솜씨가 없다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려고 했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는 아이라서 말을 못한다고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위해서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워주셨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위해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강론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성소, 부르심이란 인간의 응답과 협력으로 완성된다는 것,

    또는 인간의 소망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성된다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인간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사제나 수도자만 성소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 자체가 성소를 받은 것입니다.

    과연 그 부르심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가, 그것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신부님의 강론 제목은 제가 임의로 했음을 알려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오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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