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2010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ohjulia 2010. 7. 27. 15:3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0.07.27)

2010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 14,17ㄴ-22

17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8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9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 20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22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태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양쪽 눈에 멍이 들어서 의사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물었지요.

“싸움을 했나요? 아니면 사고가 난 건가요?”

그런데 이 남자는 의외의 답변을 합니다.

“사실 성당에서 다쳤어요.”

“아니? 성당에서 왜 다쳤어요?”

“제 앞에 계신 자매님의 엉덩이에 치마가 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빼주는데 그 자매님께서 돌아보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제 눈을 때리잖아요.”

의사 선생님은 이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 눈은 왜 멍이 들었을까 라는 의문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그럼 다른 쪽 눈은 왜 다치셨어요?”

이 형제님께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로 살짝 넣어주었더니만 주먹이 날아오네요.”

이 형제님께서는 엉큼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지요. 단지 앞에 계신 자매님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려가 진정으로 자매님을 위한 배려였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기분을 나쁘게 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배려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배려란 이러한 측면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나의 이 조그만 머리에서 나오는 판단을 ‘배려’라는 이름을 달고서 곧바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뜻하지 않은 상처와 아픔을 주며, 자기 자신 역시 되돌아오는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려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주님의 배려는 끝까지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씨앗이 상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 추수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준다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시면서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의 배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주님의 그 따뜻한 배려가 계속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점점 가라지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배려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배려의 시간은 세상 종말 때까지 만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 날이 언제 올지를 모르는 우리들은 곧바로 죄를 뉘우치고 주님 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인만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죄인이 아닌 의인의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위대했던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R. 롤랑).



친구가 되어 주겠네(‘좋은생각’ 중에서)

1860년대 미국 북부와 남부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달랐다. 북부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해 노예 제도를 반대했지만, 남부에서는 거대한 목화 농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한 달 뒤,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는 남부보다 인구가 세 배나 많았지만 병사들이 전투 경험 부족으로 계속 패했다. 게다가 탈영하는 병사가 속출하자 탈영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링컨에게 탈영병 사면 청원이 쏟아졌다. 사면 청원서에는 대개 영향력 있는 친구나 친지의 편지가 첨부되었다. 하루는 링컨이 편지 한 장 첨부되지 않은 사면 청원서를 보고 장교에게 물었다.

“이 병사는 가족이 없나?” “그의 가족은 전쟁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다음 날 링컨은 그 병사를 사면해 주겠다고 했다. 이에 장교가 물었다.

“사면을 부탁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링컨이 말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네. 그래서 참혹한 전쟁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그 병사가 친구나 가족의 사면 청원 편지가 없어 삶을 마감해야 한다면, 내가 그의 친구가 되겠네.”

링컨은 병사의 사면 청원서에 서명하고 그를 사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