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영성의 향기

<돋보기 영성 4 >마리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ohjulia 2012. 12. 7. 08:15

돋보기 영성 4 - 10월호 원고

마리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성모님에 대한 가톨릭 교리에서 성모님이 동정녀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심 받으셨다는 것은 성경과 교회의 오랜 전승으로 받아들여진 내용들이다. 하지만 믿을 교리로 최근에 선포된 성모님에 대한 가르침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1854)와 마리아가 하늘로 불러올림 받으셨다는 승천교리(1950)가 있다. 적지 않은 개신교계가 가뜩이나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폄하하는데 가톨릭 교회가 이렇게까지 성모님에 대한 교리를 굳이 선포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비판이 거셌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교의가 선포될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인류는 그야말로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이후 인간이 가진 기술적 진보에 대한 낙관론은 신 없는 인간 세상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과학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무신론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지식의 결핍이며, 합리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안식처인양 폄하되었고, 종교와 신앙은 민중들의 아편이자 도피처로 인식되고 있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사람들에게 다시 심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근대주의란 이름으로 몰아닥친 무신론적인 사유들에 대항해서 교회는 인간이 가진 기술적 진보와 이성의 능력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신앙은 이해를 동반하는 합리적인 사유이지만, 수학적인 논리와 논증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 신뢰의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가진 죄로부터 성모님은 자유로우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죄()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는 등의 윤리적이고 심리적이 결함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것들도 죄의 속성에 속하지만, 성경은 본질적으로 죄란 인간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일체의 행위와 삶을 일컫는다. 하지만 성모님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거쳐 하느님과 맺은 인연의 끈을 놓으신 적이 없으시다. 그것은 자신이 가브리엘 대천사의 잉태 예고를 받으시는 순간부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봉헌하는 삶과 사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삶으로 증언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졌음을 굳게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시는 육화의 놀라운 신비를 마리아가 몸소 겪을 수 있는 특은을 주셨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원죄(原罪)로부터 자유롭게 잉태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죄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단절이라면, 원죄란 그런 단절을 가져온 가장 근원의 죄를 일컫는다. , 인간 본성 속에 내재된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모든 죄들을 일으키는 뿌리를 말한다. 성경의 창세기는 그런 인간 본성의 원초적 죄가 하느님으로부터 빚어져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을 마주보며 대화를 하며 살던 축복의 인간 존재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명을 어기게 된 가장 근원적인 죄를 설화적 방식으로 전해준다. 뱀은 교묘하게 인간을 유혹한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여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하와를 설득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본래의 창조질서에 맞는 것인데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을 속이는 행위일 수 있다고, 자신에게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능력이 숨겨져 있음을 보고 싶어 한다. 과연 하와는 그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보였다.”(창세 3, 6)고 느낀다. 그리고 하느님의 명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아담을 그런 범죄의 첫 순간으로 끌어들인다.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나중에 핑계를 대지만, 사실 아담 역시 하와가 뱀의 유혹을 듣는 순간 함께 무언의 동의를 한 셈이다.

인류의 첫 번째 조상이 지은 이 같은 범죄는 하느님과 맺은 친교적 관계를 단절하는 가장 근원적인 죄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이 하느님 없이 살려는 유혹,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삶이 만들어 놓은 치명적인 결과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겪게 되는 삶의 고통들, 노동과 출산, 죽음이라는 세 가지는 인간이 겪는 가장 근원적인 삶의 고통을 대변해주는 것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하느님 없이 살고 싶어 하는 영적 교만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하느님은 마치 내게 계명을 세워놓고 말을 잘 들으면 상을 주고, 듣지 않으면 벌을 내리시는 심판자처럼 여겨진다. 인간을 돌보고 사랑하기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교회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만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세상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잘 돌아가고,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더 큰 성공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앙이라는 굴레에 갇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 것. 이것이 인간이 처한 근원적인 죄의 결과이다.

원죄란 결국 하느님을 향해 살도록 부름 받은 인간이 하느님 없이 살려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앙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근원적인 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적인 약점과 결함으로 하느님을 외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성까지 하느님을 벗어나 살 수 없다는 근원적인 회심을 포함한다.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인호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성모님은 하느님을 벗어나 그분의 은총 없이 살아가려는 인간의 내적 본성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고 낳으며, 아들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고 부활의 영광을 함께 입은 성모님이야말로 전 생애를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이라는 가톨릭 신앙의 믿음에 뿌리를 둔다. 원죄 없는 성모님의 잉태는 그분의 출생부터 하느님은 당신 구원의 섭리 속에 마리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선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이 지닌 영적 교만을 드러내는 회심을 이끌어주는 힘이심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점차 하느님 없는 세상을 꿈 꿀 때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끄시는 분이시고, 창조 질서 안에서 우리를 당신을 닮은 존재로서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모님을 본받을 때 우리는 그분 삶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섭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생각할 일이다.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