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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9. 피곤하십니까? - ‘피로사회’ 속의 오늘의 신앙 (1)

ohjulia 2014. 6. 20. 15:33

경향잡지 원고

 

 

피곤하십니까? - ‘피로사회속의 오늘의 신앙 (1)

 

 

송용민 신부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어떤 독일 철학자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다양한 문화 비평과 사회적 담론들 가운데 하나로 피로 사회란 말을 쓴 바 있다. ‘피로사회란 말 그대로 우리 사회가 피곤하고 고단한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처럼 먹고 살기 힘들고 외적인 환경이 열악해서 찾아오던 육체적인 피곤이 아니라, 너무 할 것도 많고, 놀 것도 많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워 하는 일종의 정신 병리학적 현상으로서의 피로감을 느끼는 사회를 일컫는다. 요즘 흔히 말하듯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우스갯말처럼 말이다.

과거의 전통 사회는 먹고 사는 일이 힘은 들었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 기준이 오늘날보다는 명확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나와 무관한 세상은 분명히 구분되었고,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굳이 확신을 하지 않아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신념이 개인의 판단과 책임을 보장해준 사회였다. 이런 공동체적 가치관과 이념으로 규제된 규율사회 속에서 나와 다른 타인은 나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이질적이고 부정적인 존재처럼 생각되어 언제나 경계와 위협의 대상으로 여겼다. 엘리베이터나 계단, 혹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데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더 그렇다. 요즘은사회가 험악해져서 이런 낮선 사회적 현상이 더 가속화된 느낌이다.

 

규율사회에서 피로사회로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전통적인 규율과 가치기준들이 우리 세상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이 중요해졌고, 나와 다른 타인들은 경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관심의 대상 혹은 짐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피로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가족 관계만 봐도 전통 사회에서는 부모의 절대적 권위가 통용되었고,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이 중요했다. 나와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운명 공동체에서는 간도 빼줄 정도로 친밀감을 갖지만, 내 삶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에게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은 내 삶의 안식처이거나 보루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관심과 계발을 방해하는 짐스러운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갑작스런 경제발전으로 세상살이가 풍요로워지고 서로에게 예속되어 살던 관계도 이제는 가족 구성원 개인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좋은 것, 풍요로운 것들이 넘치는 과잉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는 ‘~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율 때문에 살기 힘들었다면, 이제는 ‘~할 것이 많고, ‘~해야 한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이 현대인들의 삶에 피로감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정신적 병리현상까지 일으키고 있다. 부모는 내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고, 뒷바라지 해주어야할 존재였을 뿐 더 이상 공경의 대상이 아니다. 결혼한 배우자는 서로의 반쪽을 찾은 기쁨보다는 서로가 하고 싶고, 살고 싶은 인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듯하다. 자녀들 역시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모와의 유대관계도 끊기고, 버려진 학교에서의 인성교육과 돈벌이에 나선 부모와 소통이 되지 않아 식구(食口), 밥조차 함께 먹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지도 오래다.

 

피로사회 속의 신앙 현상

신앙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명확했다. 전능하시고 공평하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며, 삶의 고통과 시련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라 생각하고 인내하며 살았다. 신적 권위를 위임받은 교회와 성직자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는 것이야말로 참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죄와 벌이 명확했고, 교리나 계명을 지키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사제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교회를 떠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신앙의 방식도 바뀌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라는 제도적 규율에 갇히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굳이 교회에 몸을 담지 않고서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이제는 교회의 계명보다는 개인의 결단과 소신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인간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참된 자아에 대한 수행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적인 실천보다 더 중요하게 된 셈이다.

최근 불교의 부흥도 이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 역사 안에서 맏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프랑스 교회가 대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이제는 유럽 최대의 불교국가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개인의 가치와 신념을 소중하게 여기는 오늘의 세상 속에서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고수해온 제도 교회의 횡포나 가르침을 현대인들은 더 이상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기술과 가치로 세속화되고, 개인의 가치가 상대화되면서 어떠한 형태의 절대적인 진리 주장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다원화된 세상에서 교회는 더욱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아이러닉한 사실 하나가 있다. 과거 교회의 절대적 지위가 보장되던 시대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했던 무신론이 팽배했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신의 자리가 없을 것만 같은 현대의 기술과학 혁명의 시대에 오히려 다양한 종교적 관심과 수많은 종교들의 병립과 혼합의 다종교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또 다시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을 찾고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확신에 근거한다. 세상이 바뀌어도 종교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단지 이전 세상과 달라진 점은 그런 종교가 그리스도교가 유일하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신앙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 방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단순히 계명의 준수나 의무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오늘의 종교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탐닉하고 있는 것들, 물질주의의 문화의 팽배로 인해 인간이 잃고 있는 것들을 분명히 지적해줄 수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브라질에서 개최된 세계청년대회에서도 세상의 돈과 명예, 쾌락으로 점철된 물질주의 문명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삶이 윤택해지며 편리해졌지만, 상대적으로 잃고 있는 인간 본연의 참된 행복의 가치들, 기쁨, 평화, 자유, 해방, 사랑, 희망 등의 언어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교회가 일깨워줘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어떤 언어로 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시대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표징적인 힘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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