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영성의 향기

'조선 교구' 탄생의 일등 공신 정하상

ohjulia 2005. 10. 10. 14:17

정하상정하상

정하상(1795-1839)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서 한국인 최초의 국내대신학생이며,
< 상재상서>의 호교론 저술가이고,
신유박해 이후 국내교회의 지도자로서,
조선교구설정의 막후주역이다.
북경에 아홉 차례나 왕래하였고, 조선교구설정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하였다.

우리는 바오로 정하상에게 <조선교구설정자>라는 칭호를 드리는데,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역시 서소문에서 기해박해로 죽었고, 묘는 아버지 정약종의 묘가 있던 윗배알미리에 있다. 아직까지 전혀 잊혀져 있었다. 묘 위에 굵은 나무들이 들어서고, 거의 산비탈과 같은 높이로 평장되어 있어 묘로 식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정하상1. 정하상의 출생-성장배경-신앙생활

한국 초기 천주교 순교자의 한 사람인 정하상(丁夏祥)의 세례명은 바오로(保祿)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1795년(정조 19년) 경기도 양근군 마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었던 아버지 약종(若鍾·1760∼1801)의 둘째 부인인 문화 유씨 유소사(柳召史·1761∼1839·세례명은 세실리아)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서울로 이사하였으며 1801년(순조 1년) 그가 6세 때 아버지와 맏형 철상(哲祥)이 순교하고 가산을 모두 몰수당했다.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그와 누이동생 정혜(情惠·1797∼1839·세례명은 엘리사벳)를 데리고 숙부들이 사는 경기도 광주군 마재로 내려가 살았다.

당시 일가친척들은 천주교를 믿어 집안을 망쳤다고 그들을 비난하고
도와주지 않았고 괄시와 냉대로 대했다.
정약종의 친구가 불쌍하고 버림받은 그들 가족에 방 한칸을 내주었고,
어머니가 바늘품과 삯일을 해 가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서소문

5. 순교

그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나,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자신도 6월 1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9월 22일에 순교함으로써 그의 간절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하상은 형장으로 가는 수레 위에서도 만족한 웃음을 띠고 기뻐했다고 전하며, 8월 15일 45세의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유진길과 함께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79세로 10월 18일 순교했고, 동정서원을 했던 여동생도 42세의 나이로 11월 24일에 순교했다.

한편 그는 체포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해 두었다가, 체포된 다음날 종사관(從事官)을 통하여 당시 재상인 이지연(李止淵·1777∼1841)에게 전달하였다.

*참고 자료*
[강 건너 저편(소설 정하상)] 신중신 지음/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