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영성의 향기

종교는 쌍놈의 종교가 좋다

ohjulia 2005. 11. 7. 01:43

    종교는 쌍놈의 종교가 좋다

    옛날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구두를 자기가 닦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진짜 대통령이다. 하늘을 깨닫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대통령이다. 옛날 예수교를 쌍놈의 종교라고 하였다. 유교가 양반의 교라고 한데 대해서 하는 말이다. 교는 쌍놈의 교가 좋다. 어디까지나 봉사하는 종교라야지 종교가 양반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짓밟는 종교가 되지 않겠는가. 세상에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하는 놈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 찼으니 우리가 다 ......무엇인가. -유영모, 김흥호 사색10에서- 어쩌면 여러분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는 다석 유 영모 선생님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언젠가 신동아에서 본 기사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인용해 봅니다. "다석 선생은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알려지기를 원치도 않았다. 그저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지만 독특한 신관(神觀)과 인생관을 가진 철학자로 사후에야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함석헌 사상은 그저 다석의 갈비뼈 하나를 풀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 사이의 통설이라 한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아버지 류명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남

1905년(만 15세)

YMCA 총무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가다.

1910년(20세)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평양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2년간 봉직하다.

1912년(22세)

일본 토쿄 물리학교에 입학 1년간 수학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정통신앙을 버리고 기성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 무렵에 이미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지니다. 동경 물리학교에서 일년간 신학하는 기회에 무교회주의자 內村鑑三의 강연을 듣다.

1914년

오산학교 사직

1915년(25세)

김효정(23세)과 결혼하다.

1917년

육당 최남선과 교우하며 잡지 '청춘'에 기고

1918년(28세)

살아온 날 수를 셈하기 시작하다.

1921년(31세)

古堂 曺晩植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8대)에 취임, 일년간 봉직하다.제자 함석헌을 만나다.

1922년

오산학교 교장에서 사임하다

1928년(38세)

YMCA간사 滄柱 玄東完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을 1963년 35년간 지도 하다.

1935년(45세)

종로 적선동 솜공장을 처분하고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옮겨 농사하다.

1939년(49세)

성서조선 124호(1939년 5월호,103-104쪽)에 '湖)岩 文一平兄이 먼저 가시는데' 추도문을 기고하다.

1940년(50세)

성서조선 135호(1940년 4월호, 75-76쪽)에 '결정함이 있어라' 시편을 기고하다.

1941년(51세)

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하다.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단식을 시작하고, 이튿날엔 종신토록 부부간의 성생활을 끊겠다는  뜻의 解婚을 선언하다. 12월 5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절감하고 '눅임의 기쁨'(一日氣溫感)을 작시하여  성서조선 156호(1942년 1월호, 12쪽)에 기고하다.
1942년(52세) 1월 4일 重生日, 入敎(1905년)한지 38년만에 하나님과 예수를 깊이 체득하고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 (성서조선 157호, 1942년 2월호, 33-38쪽),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성서조선 158호 1942년 3월호, 57-61쪽)를 기고하다. 성서조선사건으로 4-5월 57일 동안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다.

1955년(65세)

일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하다. 1955년 4월 26일부터 일기(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974년 10월 3일까지 계속하다. 김흥호는 속기사를 시켜 다석의 1956-57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기록케 하다

1959년(69세)

노자(老子 늙은이)를 우리말로 완역하다.

1960년(70세)

주규식이 1960-61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받아쓰다.

1965년(75세)

강원도 평창군 방림에서 농사하는 차남 자상(自相)을 자주 찾아가다.

1977년(87세)

톨스토이마냥 객사할 요량으로 6월 21일 가출했다가 23일 밤중에 순경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오다. 그 다음부터는 거의 말을 하지 않다.

1980년(90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7월 31일 부인 김효정여사 88세로 별세.

1981년(91세)

2월 3일 구기동 집에서 돌아가다. 날수로 33.200일을 살다. 2월 5일 벽제 공원묘지의 부인곁에 묻히다.

다석 유영모 선생

1978년 5월 8일
함석헌 선생의 부인 황득순님의 장례식에서
말씀하시는 다석 선생 뒷편에 함선생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