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http://www.mariasarang.net/files/pictures/무덤으로달려가는베드로와요한02.jpg)
요한 20,2-8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제가 된 지 어느덧 13년이 됐습니다.
사제서품식 때 입었던 제의도 지나온 세월만큼 낡고 빛이 바랬습니다.
문득 세월의 무게를 느낄 때면 제의처럼 그렇게 저도 조금씩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세월의 때가 묻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꼭 삶이 무르익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순례자의 모습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입니다.
순례자에게 명예의 무게는 곧 치우기 어려운 장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명예의 무게가 쌓이면 순례자는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명예의 손짓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나그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순례자는 무엇보다 자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순례길을 가다 보면 많은 풍요로운 것들을 얻게 됩니다.
경험이 많아지고, 길도 더 훤히 꿰뚫어보게 되고 갖가지 어려움에 대처하는 법도
더 능숙해집니다.
그렇더라도 오로지 자신만을 신뢰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순례자는 늘 새롭게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순례 여정이 단 하루도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루가 새롭게 열립니다.
하찮게 보이는 길가의 풀이나 들꽃 한 송이라도, 형편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몸을 굽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상엔 귀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 꽤 많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고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만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와 같이 주님의 길을 따랐던 순례자였습니다.
늘 주님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한처럼.
"누구를 찾느냐" (창작성가 공모작 6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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