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St. Paul Miki & Companions )
축일 : 2월 6일
성인의 활동지역 : 나가사키(Nagasaki)
성인의 활동연도 : 1564-1597년
성인과 같은이름 : 미끼,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체포하라
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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