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B. Maria Virgo de Lourdes) **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고향으로](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b/1611/0211Beata%20Vergine%20Maria%20di%20Lourdes%203.jpg)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인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다.
이날 전 세계 가톨릭 교회는 병자들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의료인을 생각하며, 그들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여 사랑과 봉사 정신을 키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의 권위와 이름으로 기도한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쪽의 국경을 막은 피레네 산맥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인데, 본래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1858년 2월 11일 이후 수십회에 걸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은 후부터 일약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마을의 교외에 있는 가르와리아라는 산록을 따라 가급 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샬레 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이라고 부르는 굴(洞穴)이 있다.
이곳이 성모께서 발현하신 성지이다.
이것은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새로 신덕 도리로
반포(1854년 12월)하신 후 3년 2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가난한 물방앗간 집에서 태어난 베르타데나라는 13세의 소녀가 강을 건너 마사비엘
부근에 가서 땔나무를 하기 위해 흘러 내려온 나무를 한참 줍고 있을 때 갑자기
큰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라 뒤를 보니가 마침 굴속에 아름답고 어여쁜 한 부인이 서 계셨다.
그녀는 몸에 백설과 같은 흰옷을 입고, 허리에는 하늘색의 띠를 두르고,
손에는 백주 금쇄(白珠金鎖)의 묵주를 들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누구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 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어 같이 기도를 바쳤다.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베르나테타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께 그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월 14일 베르나데타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방문했다.
그녀는 예상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베르나데타를 따라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 베르나데타의 탈혼 상태에 놀라 그녀와 소리를 합쳐 묵주의
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베르타데타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해 종종 수백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성모 영보)축일에 16회 째의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베르나데타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다"하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베르나데타에게 발현하신 분이 성모 마리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의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베르나데타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사제에게 말하여라" 고도 분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베르나데타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이다" 하고 고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월 25일 9회 째의 발현에는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여라"하는 명령을 받았지만
베르나데타는 샘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들을 기적으로 낫게하고, 매일 12만 2천 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는 루르드의 영천(靈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영천의 난치병에 대한 효능은 실로 놀랄 만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영수(靈水)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지만, 1861년까지의 3년 동안에도 이미 백 건가량의 완치의 실례가 있었고,
의사들의 엄밀한 조사에 의해서도 "그 중의 15건은 적어도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기적이다"
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교구의 주교, 신학자,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했는데,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일치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를 순례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되었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먼 외국에서도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로 이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옆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전구를 간구하여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또한 그 영수(靈水)의 효능으로 잔치병을 회복한 자도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했다.
리용시의 한 조각가 파비슈는 베르나데타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자세히
듣고 나서 가라라의 대리석으로 그 고결한 모습을 조각하여 그것을 마사비엘의 동굴 안,
바로 발현하신 자리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 그 축성식을 거행했다.
오늘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은 바로 이것이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구로 은헤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 사람도 적지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의 뜻대로 그곳에 건립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 2일 파리의
대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져 매년 평균 60만명인데, 1933년 발현
75주년에는 실로 1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루르드에 있어서의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루르드 의국 조사
위원(醫局調査委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도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에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어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현재는 교회에서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초자연의 발생이라고 규정했지만 이를 기념하는
축일 즉 2월 11일은 일찍이 1891년에 설정되어 우선 남쪽 프랑스 일대의 교회에서
준수하게 되었고, 다시 1907년에는 성 비오10세에 의하여 전 세계의 교회에서도 준수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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