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열왕기 상권 11,29-32;
12,19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복음 마르코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어제 저는 늦잠을 자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새벽 묵상 글이 한 시간 정도 늦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묵상 글이 늦은 것은
늦잠에만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저는 묵상 글을 그 전 날부터 준비를 합니다. 즉, 다음 날 복음 말씀을 전 날 아침
미리 보고서 하루 종일 그 복음 말씀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한 뒤, 곧바로 묵상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제
새벽에는 문제가 생겼어요. 왜냐하면 제가 2월 9일 복음 말씀을 읽었던 것이 아니라, 2월 10일 복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하루 종일
기억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제 새벽 다시금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야 했고, 그래서 새벽 묵상 글이 평소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안일한 마음에 날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그래서 엉뚱한 복음 말씀을 묵상했던 것이지요. 또한 어제의 복음 묵상을 알차게 할 수 없었던 것도 물론입니다.
꼼꼼하지
않은 저의 모습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득 오늘 복음 말씀이 떠올려지면서 주님과 나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렁뚱땅 좋은 게 좋은 것이야 하면서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저와는 달리 주님께서는 너무나도 꼼꼼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잘 보세요. 얼마나 섬세하고 꼼꼼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단지 손만을 얹어만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로 데려 가신 뒤에,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습니다. 그리고 침을 발라서 그 혀에 손을 대시지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아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과연 필요하셨을까요? 그냥 편하게 사람들의 생각처럼 머리에 손을 얹기만 해도 그 사람을 낫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과 달랐습니다. 즉, 육체의 치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꼼꼼하게 당신 사랑의 손길을 계속해서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꼼꼼한 사랑의 손길. 그 손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소원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제발 좀 느끼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손길을
계속해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곧바로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구원이며,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처럼 대충하지 않으십니다. 최고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 오늘도 주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게 생활하셨으면 합니다.
꼼꼼한 사랑의 손길을 나의
이웃에게 전해봅시다.
모든 사람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줘라 ('승자의 언어' 중에서) 어느 주말 나는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난 소풍에서 그저
겉으로만 알고 지내던 사람 옆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즐기는지에 대해 얘기 해댔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던 나는 그가 꽤 편협한 스포츠맨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결국
최근에 우리가 함께 알고 지내는 두 사람이 다퉜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나는 그 두 사람 각자에 대해 나름대로의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그대로 입밖에 내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스포츠맨'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상대방한테서 놀라운 반응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인생 원칙 중 한 가지를 내비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한테든지 세 번의 기회를 줘요. 그렇게
지켜본 다음에야 그 사람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거죠."
그 뒤로 계속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지난 날 내가
겪었던 여러 만남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으로 그들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렸는지 깨달았다.
당신은 간혹 나처럼 주변의 사람들을 너무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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