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야 58,9ㄴ-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루카 5,27-32 그때에 27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제가 신학생 때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한 여름에 수단 입기랍니다. 사실 수단을 입을 때는 기분이 매우 좋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좋았을 때는 금방 잊어버리고 대신 안 좋은 지금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것처럼, 저 역시 수단 입을 때의 기쁨은 잊어버리고 한
여름에 이 두꺼운 수단을 안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자주 생각했었답니다. 그래도 신부가 되면 여름용 수단을 따로 입지만, 신학생 때에는 한 벌의
수단으로 춘하추동을 버텨야 하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한 여름에 힘들어하는 것은 수단을 입는 신학생이라면 모두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생이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수단이 어떻게 생각하면 치마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치마만 입고 있으면 아래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니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문제는 그 안에 바지를 입기 때문에 덥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에요. 하지만 수단 안에 바지를 입지 않으면 안 되니,
이것을 착안해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것은 바로 손목에 끼는 토시 형식으로 바지를 토시 형식으로 다시 만든 것입니다. 즉, 다리
종아리만을 가리는 바지 형태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수단은 긴 치마의 형태이기 때문에, 아래만 가리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신학생은 너무나 시원했습니다. 팬티만 걸치고 그 위에 수단을 입으니 얼마나 시원했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그
신학생은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서울 신학교는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경사가 가파릅니다. 따라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면서 올라가던 신부님께서 그 신학생의 수단 안쪽을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토시 형식 바지로 종아리만 가리고 있는 그래서 맨살이 환히 보이는
그 신학생의 안쪽(?)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신학생은 분명히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단이 워낙 기니까요.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는 그 틈을 통해서 그 신학생의 엽기 행각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모습을 취하려 할 때가
상당히 많았지요. 남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간직하면서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리고 자신의 옳음만을 사람들에게 보이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실하지 못하는 행동은 분명히 언젠가 환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면서 예수님께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정말로 올바른 사람이라면 우리처럼
열심한 사람들과 함께 다녀야 되는 것 아니오?”라는 의도가 담긴 것이지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의 올바른 사람인
종교 지도자들이 정말로 하느님 보시기에도 합당한 사람이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혼났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한 위선자라는 것이지요.
사순시기는 위선자들처럼 겉으로만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가 아닌 속으로 주님께
충실한 모습을 보입시다.
어떤 사랑(‘좋은
생각’ 중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말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정말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애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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