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창세기
3,8-15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14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제2독서 베드로 1서 3,18-22 사랑하는 여러분,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마르코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어떤 신부님께서 계셨는데 그 분은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강론도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는데요. 특히 강론의 시작은 이렇게 날씨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씨를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바로 이렇게 날씨의 대한 감사의 표현을 주님께 한 뒤에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계속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계속 듣던 신자들은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다행히 그 지방의 날씨가 항상 좋아서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지만, 만약 나쁜 날씨라면 과연 어떻게 표현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사람들이 기다리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 온 것입니다. 교우들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과연 오늘 같은 악천 우에서도 신부님께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씨를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날씨가
나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부님의 강론 시작이 궁금해서 구름같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답니다.
드디어 미사가 시작되었고 신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강론 시간이 되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간직한 채 신자들은 신부님의 시작 감사의 기도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같은 날씨를 매일 같이 주시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옳은 모습일까요? 그른 모습일까요? 그 모습이 보기에 좋을까요? 아니면 보기 싫은 모습일까요? 감사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기쁨을 체험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감사하면서 사는 것을 옳은 모습이라고
그리고 보기에 좋은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무척이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선
신부님의 경우를 보니, 감사함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특별한 조건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며, 내가 누리고 받는 모든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간직하기에 불평불만 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전혀 없는
공간인 광야. 더군다나 그곳에서는 사탄의 유혹도 함께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전지전능하신 분이 왜 이곳을 당신이 직접 찾아갔을까요? 왜
고생을 사서 하실까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이 받을 유혹을 당신이 직접 체험하고 이기심으로써 우리들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혹을 이기신 분께서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유혹도 직접 당하셨습니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그리고 내 삶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이시기에 매 순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고 있나요?
오늘부터라도 그 감사의 표현을 해보면 어떨까요?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우리의 영광은 고통 중에
있다(헬리나웬, '춤추시는 하느님' 중에서) 우리의 영광은 고통 속에 숨어 있다. 고통을 겪는 가운데
하느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도록 기회를 드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상처에 반대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상처를 변하게 하여 더 큰 선을 이루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는 것이며, 우리와 함께 그 선을 발견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춤에 초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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