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ohjulia 2006. 3. 29. 06:44
2006년 3월 29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복음 요한 5,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어떤 분들과 강화도 해안가로 자전거를 함께 탔습니다. 약간 쌀쌀하고 바람이 조금 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전거 타기에는 상당히 좋은 기상 조건이었습니다. 아무튼 저희는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야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체력을 키웠지만 다른 분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막길을 오르실 때에는 얼마나 힘들어 하시던지요. 아무튼 저는 평소 속도의 절반 정도로만 달리면서 이분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이분들은 강화도 해안도로에서 처음 자전거를 타시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쩔까 싶어서 속도를 줄였지요. 그러다보니 비록 저의 평소 운동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겠지요. 물론 약간의 답답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함께 타는 자전거는 어느 때보다도 훨씬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혼자 탈 때에는 속도를 내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지만, 함께 탈 때에는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가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향해서 가는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또 힘들어서 그 자리에 멈추어 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러한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먼저 앞서 가시지 않지요. 기다려 주시고, 또 천천히 가시면서 우리들과 보조를 맞추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당신이므로 우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때,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그러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시기 때문에, 즉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그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당신을 믿지 않겠다고, 당신에게 아픔을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순간에도 당신을 직접 드러내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요.

“관둬라. 안 믿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너만 손해지 뭐....”

그런데 주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단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 양을 위해서 길을 떠나는 목자처럼, 우리들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께 무엇을 드렸는가요? 사랑보다는 미움을, 기쁨보다는 아픔과 상처를 전해드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오늘만큼은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보면 어떨까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내 마음에 휴식이 되는 글('좋은 글' 중에서)

무지개 같은 환상의 아름다움과
노을빛의 숭고함이 깃든 세월의 언저리에서
꿈의 빛깔을 볼때면
순간적인 시력에 의존함이 아닌
영혼의 깊은 울림에서 그를 느낄 수
있다는걸 알게 됩니다.

비탈진 세월의 양지에서도
그 세월의 언덕 후미진 음지 에서도
피어나는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자란 다는걸 알게되는 날들 속에서
우리가 간혹 역류하는 숱한 감정 들을
어떻게다스리며 살아 갈까요.

산다는것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며
행복하기 위한 가파르고 힘든 고개 길을
넘어가는 만족을 향한 길이 아닌지요.

작은것에서 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비워진 마음으로
헤아리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늘 행복 하게 느끼며
살아내는건 아닐까 하네요.

아주 작은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을 누릴때
마음안에서 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이
진정 삶의 질이 달라지는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