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제노 (4월 12일) 주교, 순교

ohjulia 2006. 4. 12. 14:51
고향으로 , 성 제노
 

    성 제노 (St. Zeno) 주교, 순교

    성인의 활동지역 : 베로나(Verona) 성인의 활동연도 : +371년 제노는 ’살다’란 뜻이다. 성 제노의 생애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성 그레고리오의 대화집 속에 나타나는 자료로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성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그는 베로나의 주교로서 순교했다고 하나, 그와 동시대 사람인 성 암브로시오는 그의 편지에서 제노가 증거자로서 선종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며, 그의 라틴어 저술이나 인용문들을 살펴볼 때 훌륭한 지식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그는 매년 수많은 이교인들을 개종시켰고, 특히 아리아 이단에 강경했으며, 고트족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을 때, 대금을 지불하여 속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노 자신은 극히 가난한 삶을 살았다. 또 성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그의 지도를 받고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동정녀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제노는 아가페의 남용을 비난했고, 장례 때에 큰 소리로 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제노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의 주교로서 4세기에 일어난 아리우스파의 이단과 투쟁해 그 해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려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노력한 교회의 교부 중의 한사람이다. 주교가 되기 전까지 그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성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310년경 아프리카의 북부에서 태어나 당시 대 웅변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카르타고의 아불레이오의 슬하에서 수사학(修辭學)과 그의 학문을 배운 바 있다. 그리하여 그도 역시 웅변과 문장에 우수하여, 그 설교에 있어서도 내용이 풍부하고도 깊고, 표현이 적절하고도 우수한 점으로 보아 실로 대 아우구스티노와 비교할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노의 신앙과 이웃을 사랑하는 덕은 그의 박학한 지식을 능가하는 점이 있었다. 그가 베로나의 주교가 된것은 362년 12월 8일이었지만, 그 때 아리우스파의 이단은 북쪽 이탈리아에도 세력을 펴고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는 그 이단 사상에 빠지는 이가 많았고, 또한 외교인들 중에는 과거 3백년간 역대 황제의 박해를 받아 온 교회에 진저리를 느껴 진리의 교회를 거역하는 이가 많았으므로, 제노 주교는 신앙의 입장에서는 이를 근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보속의 고신 극기를 행하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천재적 웅변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참된 종교의 존엄과 행복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혹은 아리우스파 이단의 그릇됨을 지적하며 오로지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새로 입교하는자, 이단에서 개종하는 자가 연달아 증가해 삽시간에 베로나의 교회는 놀랄만큼 성대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제노 주교의 우수한 학식과 덕망의 덕분이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감탄할만한 극기, 희생의 생활과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마귀를 쫓아버리는 신기한 능력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제노 주교는 이단에서 교회로 개종한 베로나 시민을 잘 지도하며 그 도시에 대성당을 건립하고 또한 신자에게 자선 사업을 장려했다. 예컨대 그 당시 게르만족이나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침입해 신자들을 포로로 납치하기도 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기도 했으나, 제노 주교는 자신의 관할 교구의 신자들에게 독촉해 그 포로들을 속량해 주기도 하고, 빈궁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면서 박애 사업을 행했으므로, 베로나 교회라고 하면 자선 사업의 활동에 있어서 전 이탈리아의 그리스도의 신앙을 두텁게 하고, 신앙심을 굳게 하기 위해 서양 최초의 여자 수도원을 세웠다. 지금까지는 동정의 서원을 발한 소녀들도 아직 자신의 집에 머무르면서 다만 할 수 있는 대로 세속적 교제를 피하며 생활한 데 불과했으나, 제노 주교는 이러한 사람들을 세속의 위험에서 구해 동료들과 함께 덕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이에 공동 생활의 길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그의 뜨거운 공경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이단자의 그릇된 설에 대해 성모의 평생 동정을 열렬히 주장하며 ’아, 위대한 현의(玄義)여! 마리아는 티끌만큼도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고 또한 하자없으신 동정의 몸으로 성자를 낳으시고 그 후도 아주 정결한 동정의 몸으로 계셨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로써 그가 얼마나 성모를 공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제노 주교의 최후에 대해서는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않다.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진력한 공로로 인해 교적(敎敵)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미움을 받아 저 베로나 시에서 가까운 부릭센 시에서 같은 시대에 주교였던 필라스드리오가 그들에게 참살된 것처럼 제노 주교도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진리를 증명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371년의 예수 부활 축일경이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