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복수는 꿈꾸지도 맙시다.

ohjulia 2006. 4. 17. 06:51
2006년 4월 17일 부활 팔일축제 내 월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2,14.22-33
14 [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복음 마태오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어제는 신부님들이 이곳 갑곶성지를 방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술 한 잔 기울이다보니 이렇게 새벽 묵상 글이 늦어지는 것은 물론 새벽 방송도 하지 못하게 되네요. 진심으로 죄송하며, 내일부터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참, 새벽방송은 수요일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어느 마을에서 넓은 도로를 만들려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거대한 돌산이 방해가 되는 것이었어요. 설계사는 이 산에 터널을 뚫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깊게 판 구덩이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은 뒤 폭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모든 주민이 대피한 줄 알았는데 한 아이가 폭파 지점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이는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 놓인 예쁜 돌멩이 하나를 보고서 달려갔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당황에서 아이에게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그 모습을 보고서는 오지 않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어른들이 무서웠는지 사람들이 없는 그러나 곧 폭파될 지점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그 모습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바로 그 순간 아이의 엄마가 나타났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향해서 무릎을 꿇고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재빨리 달려와 엄마 품에 와락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위협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이를 안정시키고 편안함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엄마의 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엄마도 답답한 마음에 “너 빨리 안와? 너 죽고 싶어?”하면서 위협의 말을 던졌다면 아이는 겁에 질려서 엄마에게 달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편안한 엄마의 품을 보았기 때문에, 위험이 가득한 폭파될 지점의 정반대로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엄마와 같은 모습을 보였지요. 분명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도망감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더 쓸쓸하게 만들었지요.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지요.

“평안하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써 당신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꾸짖으셔도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모습인 사랑으로써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사랑에 감동을 받았고, 예수님께 방향을 돌려서 예수님의 품 안에 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은 과연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섰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그 사람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복수심을 드러냈던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그 사람과 더욱 더 먼 거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편안한 예수님의 품을 우리들의 가슴에도 담아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안아줄 수 있습니다.


복수는 꿈꾸지도 맙시다.



좋은 만남('행복한 동행' 중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발견하는 사람이 있고 약점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많이 늙었다. 무슨 고생을 그렇게 했냐?"며 아픈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안아주며 '좋아 보인다'고 조용히 격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장단점을 잘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만, 어떻게 대하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남의 약점을 찾아 밝히는 사람일수록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힘드렉 살아갑니다. 하지만 장점을 찾고 격려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습관이고 성격일 수 있습니다만, 한번쯤은 꼭 자기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만남이란 정심과 진심으로 상대방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보는 만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