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
나해(성소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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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행전 4,8-12 그 무렵 8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제2독서 요한 1서 3,1-2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아주 간단한 그러나 풀기는 어려운 문제 하나를 내볼께요.
어린이 한
명, 잘생긴 남자 한 명, 못생긴 남자 한 명, 아름다운 여자 한 명, 이렇게 4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글쎄 우산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들은 빗방울을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우산을 썼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우산이 상당히 커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작아서 그랬을까요?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비가 전혀 오지
않으니 우산이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빗방울을 맞을 일이 없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고정관념 속에 빠져서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지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종종 사제로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저를 부르셨을까요? 신학생 때 저는 ‘내가 과연 사제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을 너무나 많이 가졌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이끄는 목자의 역할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주 말씀드렸지요.
‘주님, 왜 저를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까? 저는 당신의 일을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 중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요. 오히려 보통 사람과
비교했을 때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을 보고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체 때문에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시니까…….
우리 인간들도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의 능력만을 보고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고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한 부분일 뿐이지요. 이처럼 주님께서도 능력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그 자체를 보고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우리들은 부활 제4주일인 동시에 성소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성소주일은 단순히 사제, 수도자 성소만을 기억하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이 주님으로 받은 성소, 즉 주님의 일인 사랑을 이 세상에서 펼치라는 부르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날인 것입니다.
나는 그 부르심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몫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모습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현재 진행형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풉시다.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좋은 글' 중에서)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세 개의 물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론이 행복론을 요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첫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라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불확실한 미래도 아니라 하느님이 내게 허락하신 현재라는 것이지요.
둘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옛날에 알았던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현재 나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 곧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얼굴을 맞대며 인생의 행로 가운데서 파생되는 잡다한 문제들로 인하여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내 곁의 사람이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서 무슨 "귀인"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세째로,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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