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파코미오 (St. Pachomius) 수도원장
성인의 활동지역 : 타베니시(Tabennisi)
성인의 활동연도 : 292?-348년?
성인과 같은이름 : 빠꼬미오, 빠꼬미우스, 파코미우스
이집트 테베(오늘날의 룩소르 근방, Luxor)에서 이교도인 부모 밑에서 자라난
성 파코미우스(또는 파코미오)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대에 징집되어
이곳저곳에서 복무하던 중 라토폴리스(Latopolis)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군대를 떠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은수자 성 팔레몬(Palaemon)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나일 강의 타베니시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환시를 보고 320년경에
그곳에 움막을 세웠다.
그러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후 그는 테베에만도 6개의 큰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한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를 철저히 배격했고, 라토폴리스의 주교회의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그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 3천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되지는 않았다. 그는 공주(共住)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로 꼽히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역시 그의 규칙을 여러 번
인용하여 자신의 규칙을 만들만큼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안토니오와 같은 이집트인이었으나, 안토니오와는 다른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292년 테베에서 조금 높은 지역인 나일지역 스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기록상 적어도 한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 당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치하에 있었고 312년 Maximin Daia 황제는
Licinius와 싸울 병사를 필요로 하였다. 사람들은 강제로 징집되었고,
병사들은 파코미오 마을에 와서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그를 생포해 갔다.
그는 20세이었는데 좋든 싫든 병역에 종사해야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보내졌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나일에서 테베로 내려갔고 그 도시의 감옥에 밤 동안 갇혀 있었다.
거기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이교인인 파코미오는 이 신자들의 애덕에 감동하였고 이 추억은 그의 전
생애 동안 함께 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에게나 애덕을 베푸는 자였다.
이 확신은 그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개념이 크나큰 중요성을 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파코미오는 안티노에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나일에 돌아갔으나 집에 가지 않고 안토니오처럼 하느님께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가 세례를 받은(313) 마을 센셋 가까이에 정착하였다.
그는 인류에 봉사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그가 할 수 있는 한 주위의 사람들을
도왔다.
다음에 그는 가까이에 살고 있던 팔레몬이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나일강의 타넨니시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환시를 보고,
320년경에 그곳에 움막을 세웠다.
그러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후 그는 테베에만도 6개의 큰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한 수도원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아리아파를 철저히 배격했고, 라토폴리스의 주교회의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었다.
그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 3천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받지는 않았다.
그는 수도원 공동체 설립의 창시자로 꼽히며, 성 베네딕또 역시 그의 규칙을
여러 번 인용하여 자신의 규칙을 만들만큼, 서방 수도원사의 아버지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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