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St. NEREUS and St. Achilleus) 군인 ,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로마 (Rome)
성인의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인과 같은이름 : 네레오-네레우스
아킬레오-아낄레오, 아낄레우스, 아칠레오, 아칠레우스,
아킬레우스
교황 성 다마소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의 순교자들은 크리스챤이 된 로마 군인이었으며,
더 이상의 군복무를 거절하여, 비아 아르데아띠나의 도미띨라 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은 플라비아 도미띨라의 종들이었는데,
그들의 종교 때문에 그녀와 함께 귀양가서 사형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성인에 대한 신심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치안을 맡은 군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테라치나 섬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은 후에 도미틸라 묘지라고 알려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896년, 데 로시의 발굴에 의해 390년에 시리치우스 교황이 건축한 지하 교회에서
그들의 빈 무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죽은 지 200년 후에 교황 대그레고리오는 그들의 축일에 즈음하여 28번째
설교를 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이 성인들은 세상을 경시하고 평화와 부와 건강이
세상의 매력을 줄 때에 그 세상을 발 아래 내던졌습니다."
많은 초기 순교자들의 경우처럼 사건 자체가 역사의 안개속에 가려져 있음에도 교회는
그 기억을 고수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들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무력과
물질주의, 잔인하고 비판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의 현존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변화되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용기는 우리보다 앞서 신앙의 표적과 그리스도의 상처로 흔적을 남기고
간 남녀 영웅들에 의해서 활기를 되찾는다.
다마소 1세 교황은 4세기에 그들을 위한 비문을 썼다.
그 비문은, 비석이 아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때 그것을 읽은 여행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었지만 후에 데 로시가 발견한 파편들로도 그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네레오와 아킬레오 순교자들은 군인의 신분으로서 폭군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잔인한 직무를 실천하며 언제나 공포에 떨며 푹군의 명령에 따를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 신앙의 기적이여! 갑자기 그들은 그들의 미친 짓을 그만두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사악한 지휘관의 진영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와
갑옷 그리고 피에 물든 창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꺼이 신앙이 승리한 것을 증거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마소 1세 교황의 기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성녀 도미틸라,성 판크라시오 동료순교자
Sts. Nereus and Achilleus, Domitilla and Pancratius
교회내에서는 네 명의 성스러운 순교자를 함께 기념한다.
그들의 천국에 개선한 날짜는 동일하지 않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네레오 및 아킬레오 두 형제는 1세기 중엽 로마 군대에 들어가 시내 경비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마음에도 없는 참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도 종종 있었으므로 이에 싫증을 느껴 군대를 떠나 황제의
근친 프랄비아 가문의 공주 도미틸라의 시종관이 되었다.
그리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 베드로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도미틸라는 네레오 형제의 한결같은 부지런한 봉사에 감탄하여 살펴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처럼 훌륭한 행위로 이끄는 종교가 그리워져, 그 형제들에게 자기도
신앙에 들어가리라는 뜻을 나타냈다.
형제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주인의 말에 기뻐하며 그 즉시 공주를 교황에게
모시고 가서 교리를 연구하게 하고 세례까지 받게 했다.
도미틸라 공주는 예전에 아우렐리아노라는 귀족 청년과 약혼을 맺었는데 그는
이교도였다.
그리하여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는 결혼을 하면 혹시 공주의 구원 사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매우 염려하여 성의껏 공주에게 충고하자 공주도 그 위험을
깨닫고 아우렐리아노와의 혼인을 파기하고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클레멘스 교황으로부터 동정 서원의 뜻인 머리수건을 받았다.
자기 가족중에서, 또 로마의 명예로운 군인 중에서 금지된 그리스도교를 봉행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황제 도미시아노의 놀람은 어땠을까?
도미시아노 황제는 즉시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를 부러들여 배교하기를 명했으나
신앙이 견고한 그들이 듣지않자 황제는 그들을 본시아라는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갖은 영화 속에서 아무 불편 없이 도회지 생활에 익숙했던 도미틸라에게 있어서
이 유배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독했는지!
그러나 그녀는 일체의 모든 불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잘 참아나갔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점차 더 심해갔다. 보신아 섬에는 미누디오 루포라는
사말이 와서 신자들을 압작하기 시작했으나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 세 사람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네레오 형제는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며 마침내 테라치나라는 섬으로
다시 귀양가게 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도미틸라 공주에 대해서는 약손자 아우렐리아노가 다시 설득해 보기 위해
레오도라와 에우프로시나라는 두 부인을 로마로부터 보내 온갖 감언 이설로 유혹을
했으나 역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주 편에서 그들
두 부인을 신자로 개종시켰기에 루포는 그들 세사람을 테라치나에 보내어 그곳에서
한 집에 몰아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도미틸라 및 네레오 형제의 유골은 후에 로마에 옮겨져 프라비아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어 교회 신자들의 존경을 많이 받게 되었다.
성 판크라시오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시대에 청형되어 순교한 소년이다.
그는 교회에서 옛날부터 특별히 존경을 받아왔고, 로마에는 지금도 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어 추기경좌의 높은 격식(格式)이 마련되어 있다.
판크라시오는 소아시아의 피리지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후 백부 디오니시오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학자의 소개로 마르첼리노 교황을 알현하고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어, 겨우 14세 때에 꽃이라면 봉오리와 같은 홍안의
미소년으로서 용감히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명했다.
그는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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