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요한 1세 (5월 17일) 교황, 순교자

ohjulia 2006. 5. 18. 07:14
고향으로 , 성 요한 1세
 

    성 요한 1세(St. John I) 교황,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526년 성인과 같은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태생인 성 요한은(Joannes)은 로마(Rome)에서 부제가 되었다가 523년 8월 13일에 교황 호르미스다(Hormisdas)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단 척결을 앞세워 박해하자, 아리우스주의자이면서 동고트족(Ostrogoths)과 이탈리아의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교황 요한 1세(Joannes I)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그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유스티누스 1세를 직접 찾아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건물 압수와 강제 개종을 통한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525년에 교황으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에 도착한 교황 요한 1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 당시 서로마 제국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교황 요한 1세와 유스티누스 1세의 만남은 서로마 제국의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교회 간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재통일을 꿈꾸는 황제와의 관계가 한층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 결과가 만족스러웠지만 강제로 개종한 사람들이 다시 아리우스주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교황 요한 1세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526년 4월 19일 콘스탄티노플의 성녀 소피아 대성전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통해 로마 교회의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에피파니우스 교구에 대한 수위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것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테오도리쿠스는 이미 위대한 철학자 보에티우스를 처형시켰으며, 귀향하는 교황 요한 1세를 체포하여 자신의 왕국 수도인 라벤나(Ravenna) 감옥에 가두었다. 이 감옥에서 교황 요한 1세는 526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요한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다. ’착한 교황 요한’이란 말은 아직도 가톨릭, 개신교, 유다인들의 가슴 속에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이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요한 23세 이전에 이미 요한의 이름을 가진 22명의 교황이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요한1세만이 유일하게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요한 1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아니즘 이단과의 투쟁 속에 교황의 자리를 계승한다. 이탈리아는 이단과 결탁한 황제에 의하여 30년 동안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는 제국 전체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러나 황제의 정책은 젊은 요한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무렵에 바뀌었다. 동로마의 황제가 자기 영토내의 이단자들에게 엄한 정책을 펴기 시작했을 때 서로마의 황제는 교황 요한에게 동로마가 이단에 대하여 완화 정책을 쓰도록 동로마에 사절로 가라고 강요했다. 서로마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계속 관용으로 대하게 하려는 안전 보장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협상의 방법이나 결과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교황 요한이 로마로 돌아올 때 그는 황제가 황제의 적인 동로마 황제와 자신이 친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 요한이 귀국하는 도중 라벤나에 이르렀을 때 황제는 그가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갇힌지 얼마 안되어 교황 요한은 사망하였다. 교황이 사망한 이유는 그가 받은 대접 때문이었던 것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