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첼레스티노 5세 (5월 19일) 교황

ohjulia 2006. 5. 19. 06:36
고향으로 , 성 첼레스티노 5세
 

    성 첼레스티노 5세(St. Celestine V) 교황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210-1296년 성인과 같은이름 : 셀레스틴, 첼레스띠노, 첼레스띠누스, 첼레스티누스, 코일레스티노, 코일레스티누스 첼레스티노는 ’천국의 주민’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아브루찌의 이세르니아에서 출생한 삐에뜨로 디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12 아들 가운데 일곱째로서, 20세 되던 해에 은수자가 되었다가,사제가 되려고 자신의 움막을 떠나, 마침내 로마에서 서품을 받았다. 1246년에 그는 파이졸라의 베네딕또 회원이 되었고, 술모나 근방의 몬떼 모로네에서 은수생활을 계속할 허락을 받았다. 많은 군중들을 피하여 5년을 이렇게 살다가 2명의 동료와 함께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몬떼 마엘라로 숨어들었으나,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지금은 수도원이 된 몬떼 모로네로 되돌아와야만 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시켰지만,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74년, 그는 자신의 은수자회인 첼레스티노회를 승인받았으며,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서거 후에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2년 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하자, 삐에뜨로는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인사로 말히기를,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추기경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84세의 노령인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294년 8월 29일에 첼레스티노 5세로 등극하여 혼란하던 교회의 키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와버린 유일한 교황이다. 가예따니 추기경이 그를 승계하여 보니파시오 8세로 등극하였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졌으므로,그는 첼레스티노를 아나니 근교의 푸모네 성(城)에 감금하였다. 첼레스티노는 이 성에서 10개월 만에 운명하였다. 그는 아뿔리아의 치따 두칼레 교외인 깐딸리체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신심깊은 농부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소몰이를 하는 등, 농사 일을 거들었으나, 항상 기도하는 열심한 소년이었다. 성장한 뒤에도 펠릭스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치따 두칼레의 카프친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수련기부터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깐딸리테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30세에 성대서원을 발하였고, 4년 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비롯하여 수도원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성 필립보 네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천주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 교회를 통치한 교황 중에는 거룩한 순교자가 많은 반면에 또한 학덕이 출중한 인물도 적지 않은데 성 베드로 첼레스티노와 같은 이는 그 중에도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아브루치의 이세르니아에서 태어난 피에트로 디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12아들 가운데 일곱 째로 집안이 빈궁한데다가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12명의 유아를 길러야 할 중책은 어머니의 허약한 팔 하나에 달려 있었으므로 베드로는 어머니의 승낙을 얻어 부지런히 독학을 하여 사제가 되려고 결심했다. 서품 받기 전 덕행의 부족함을 염려한 그는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인기척 없는 모로네라는 산중에 들어가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행과 기도로 나날이 덕해의 길로 매진하는 그의 소문이 세상에 퍼짐에 따라 그의 덕을 사모하며 제자로서 모여든 사람이 상당히 많았고, 모두 그의 지도를 열렬히 간청했으므로 베드로는 사제가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남의 영혼을 돌볼 수 없음을 자각하고 드디어 로마에 가서 신품을 받고 한 목자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첼레스티노는 재차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곧 자기네들의 수덕의 도장으로 삼고있던 모로네 산이 개간될 운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다시 적막한 곳을 찾아 제자들과 더불어 마이엘라 산에 가서 살았지만 그후로도 제자는 계속 증가하자 베드로는 작은 것이나마 수도원과 성당을 짓고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인가를 얻어 성 베네딕토의 규율을 채용하기로 했다. 이것은 1254년의 일이었으나 그 후 똑같은 수도원이 16개소나 생겨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에게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부터는 일괄하여 첼레스티노 수도원이라 하고, 베드로는 1286년까지 친히 원장으로 근무했으나 그의 은수에 대한 동경심은 도저히 버릴 수 없어 그로 말미암아 그 직을 사임하고 재차 은수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베드로가 74세의 고령에 달했을 때 우연히도 2년간이나 교황의 성좌가 공석이었으므로 추기경들은 열심히 그 자리를 채울만한 인물을 물색중이었는데, 좀체 적당한 후보자가 나서지 않아 곧 추천할 수가 없었다. 이럴 즈음 의장 라디노 마라부랑가는 특히 근심하며 이시대는 성인과 같은 교황을 요구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전부터 덕행으로 유명한 베드로를 추천한 결과 다른 이들도 다 찬성하게되어 드디어 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의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즉시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 소식을 알렸을 때 베도로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겸손한 그는 노쇠한 몸으로써 그런 중책을 맡는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깊은 산의 밀림 속에 숨어 다른 어떠한 사람이 교황으로 선임되기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성좌에 앉을 것을 원하며 일동이 그의 행방을 탐색해 그의 거처를 발견했으므로, 이에 베드로도 이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즉시 주교의 축성을 받고 마침내 교회라는 노아의 배를 젓는 선두의 중책을 감당해 내게 되었다. 이에 교황이 된 베드로는 그의 이름도 첼레스티노(천국을 갈망하는 자)5세 라고 고치고 교회의 일은 주로 추기경들에게 분담시키고 자신은 역시 은수에 가까운 수도 생활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폴리 국왕 가롤로 2세는 정치적인 야망에서 첼레스티노를 로마에 두지 않고 억지로 자기의 수도 나폴리에 있게 한 후 그를 제쳐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추기경을 채용하면서 크게 세력을 부렸다. 이는 온전히 선량하고 세속 사정에 어두운 첼레스티노가 교묘히 속은 결과였다. 그때 그를 추천한 책임자인 라디노 마라부랑가는 심적 고통으로 갑자기 죽어서 세상을 떠났으며, 교황도 자신이 그 직책에 부당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나폴리 국왕의 동의하에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와버린 유일한 교황이다. 이같이 수개원간 교황직에 있다가 그만 둔 베드로는 재차 옛날과 같이 은수생활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가예타니 추기경이 그를 승계해 보니파시오 8세로 등극했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졌으므로 그와 같이 인망 있는 인물을 함부로 놔둔다면 이를 옹호하는 이가 많이 나와 교회에 분열의 불상사를 야기 시킬 우려가 있다하여 그를 로마에 끌고 가서 그 부근에 있는 푸모네 성에 감금 유폐하고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래도 베드로는 조금도 원망 없이 오히려 중책을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제자인 두 수사와 더불어 오로지 기도와 고행의 나날을 보내며 하느님께 교회의 평화만을 기도했다. 첼레스티노는 이 성에서 10개월만에, 즉 1296년 5월 19일에 운명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