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6월 21일) 수사, 증거자

ohjulia 2006. 6. 21. 06:31
고향으로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St. Aloysius Gonzaga) 수사, 증거자, 신학생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568-1591년 성인과 같은이름 : 공사가, 알로이시우스 주님은 어디에서든지 성인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 심지어는 잔인하고 타락한 문예 부흥기의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렌스는 "사기,살인,독살,음탕이 난무하는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시오 곤자가에게는 "신심의 어머니"가 되었다. 왕족의 아들인 그는 왕궁과 군사 훈련장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로이시오가 영웅적인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알로이시오는 일곱 살에 심오한 영적 자극을 체험했다. 그는 마리아의 성무일도, 시편 기도 외에도 신심 기도를 바쳤다. 그는 아홉 살에 고향인 카스틸리오네를 떠나 플로렌스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열한 살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재를 지키는 등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부모와 오스트리아의 여왕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했으며, 필립 2세의 궁전에서 시동(侍童)으로 지냈다. 알로이시오는 궁중 생활을 보면 볼수록 그것을 외면하고 되었고 성인들의 생활을 공부함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체험에 관한 책을 읽고 난 그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고 그의 결심은 스페인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고는 4년에 걸친 아버지와의 투쟁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도 그를 "평범한 소명"에 머물러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소원대로 가문을 계승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예수회의 수련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른 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종류의 고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행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더 많이 먹어야 했고 다른 학생들과 오락을 즐기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철학 공부로 4년을 보냈으며 로베르토 벨라미노 성인을 그의 영적 지도자로 삼았다. 1591년에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었다. 예수회는 자체 병원을 개설했고 총장과 다른 많은 예수회 회원들이 직접 봉사에 나섰다. 알로이시오도 환자들을 씻기고 그들의 침대를 만들면서 간호했다. 그러다가 그만 그 자신이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회복된 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고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며칠 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기도 생활의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섬기고 있는 마르끼스 페란떼 까스티글리오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롬바르디의 가족 城에서 3월 9일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에 있었으나, 아주 어릴적부터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577년에 그는 공부하러 플로렌스로 가서, 만투아 공작의 궁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알로이시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경험한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으로 불탔다. 마침내 그가 16세 되던 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친의 격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 했으나 드디어 그는 1585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으며,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듯 하였다 예수회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을 열자, 알로이시오는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자신도 만성 열병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성인이 후일 그의 성덕을 증언하였다. 성 알로이시오의 자서전과 편지 및 영적인 저술들은 아주 독특하고 다른 시대와 사회 사람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다.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교황 베네딕또 13세에 의하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비오 11세에 의해서는 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부산교구홈에서)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페나테 곤자가와 마르타 타나산테나의 아들이며 양친은 모두 여러 추기경과 교황을 배출한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페란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영국 왕 헨리 8세가 주는 높은 지위를 사양했고, 그의 아내는 자선 사업에 전심했으며 아기를 가질 희망이 보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성서를 열심히 읽었다. 맏아들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만토봐 근처에 있는 카스틸리오네 성에서 태어났다. 알로이시오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무척 사랑스럽고 얌전했다. 좀 큰 뒤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떤 으슥한 구석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는 소원밖에는 없었다. 어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만들 생각으로, 네 살 때에 벌써 그 몸에 알맞은 군복과 무기를 장만해 주기까지 했다. 어떤 날 아버지는 알로이시오를 카살레 요새로 데리고 갔었는데, 알로이시오는 거기서 매우 재미있어 했고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마한 야포(野砲) 화약을 재기까지 했었다. 대포가 발사되자 모두들 영문(營門)에서 무슨 반란이나 일어난 줄 알았고 알로이시오는 알로이시오대로 포의 반동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알로이시오는 병사들의 그 고상하지 못한 말투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튜니즈에 원정(遠征)을 가려고 배를 탄 후에 알로이시오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1577년 원정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알로이시오와 그의 동생 로돌프를 플로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 1세의 궁정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알로이시오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의 표준어인 토스카 말을 배웠다. 그의 좋은 성적은 엘레오노라와 마리아 레메리치스 왕녀들에게 모범으로 인용 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결점, 즉 분노, 조급증, 불만 등을 쳐 이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는 아직 묵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로사리오의 현의(玄義)에 대한 작은 책자를 읽은 덕택으로 천주의 성모께 대한 그의 정성이 더 커졌다. 그가 마리아의 종 수도회 성당에 있는 성모 영보성상 앞에서 종신 정결 서원을 올린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비록 손톱만한 유혹을 당한 일조차 없었으나, 그때부터 엄한 경계와 극기에 전심했다. 1579년 알로이시오는 아버지께 불려 만토봐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신장병(腎臟病)의 초기 증세가 보였으므로 철저하게 음식물을 조심하여 병을 완전히 고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로 인해 몹시 약해졌다. 몇달 후에는 카스틸리오네로 가서 자기 영혼에 선익을 찾아냈던 단식재를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묵상을 했다. 이러는 중에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매일의 묵상"이라는 책과 "인도 통신"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어 예수회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알로이시오는 보로메오 추기경을 접대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7월 22일에 그에게 첫영성체를 시켜주셨다. 그가 다시 카살레에 가서 머무르는 동안, 군대에는 별 관심도 없이 고어연구 (古語硏究)에 많은 진보를 보여, 특히 세네카와 폴리카르포 및 영성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읽었으며, 그와 동시에 카푸친회 수도원과 바르나바회에 대해 우러러보았다. 1581년 그는 다시 카스틸리오네로 돌아와 하루에 한 주먹의 음식 밖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쇠사슬과 박차의 바퀴를 가지고 고신 극기를 했으며, 밤을 거의 기도로써 지냈고, 그때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한 것이 끝내 낫지 않았다. 만약에 알로이시오가 끊임없이 "내 하느님이여, 나를 인도해 주소서!"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던들 영적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581년 페란테 경이 스페인 왕의 시종장이 되자 알로이시오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디에고 황태자의 선생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자기 연구, 그 중에도 특히 학술적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굴복한 후 그가 라틴어로 필립 2세를 치하한 연설문을 보면 그의 문학적 소양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술과 검도를 배우는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꾸중을 무릅쓰고라도 살짝 빠져나갔는데, 그것을 보면 순명이 그때 알로이시오의 으뜸가는 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라나다의 루수의 저서를 읽고, 또 한 시간씩이나 아무 분심없이 묵상을 계속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서너 시간 동안 투쟁을 해야만 했다. 만토봐에서 세속을 버릴 생각을가지고 있던 알로이시오는 디에고 왕자의 죽음으로 한층 더 세속을 경멸하게 되었다. 알로이시오는 처음에 카푸친 수도회와 또 개혁할 단계에 있는 오랜 수도회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그때 초창기의 비약적인 열성을 보여 주던 예수회를 택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로 마음이 끌린 것은 특히 청소년 교육과 외교인의 귀화라는 그의 취미가 있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수도회에 들어가야만 나중에 아무런 고위 성직도 맡지 않게 되리라고 확신한 까닭이기도 했다. 이 사정을 알자 아버지는 우선 격노했고 시일을 좀 끌기 위해서 만토봐, 페라라, 팔마, 토리노 등지의 궁정을 구경시켰으니 그것이 1584년의 일이었다. 여러 주교들이 그를 재속 성직자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혹은 그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이 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설복시키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피가 나도록 편태하는 것을 문틈으로 엿보고 또 예수회 신부 한 분을 시켜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성소에 대해 꼬치꼬치 여러 가지를 물어본 후 마침내 그 수도회에 들어가는데 동의를 했다. 수도원으로 떠나기 전에 알로이시오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7,8개월을 밀라노에 머물면서 그동안 철학 공부를 계속 했다. 1585년 7월에는 만토봐에서 성 이냐시오의 수련을 했고, 11월 2일에는 동생 로돌프에게 자기 공작령(公爵領)을 양도한다는 증서에 서명하고 4일에는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로렛다에 들러 자기를 낳을 때에 어머니가 하신 그의 청원기는 단축되었으니, 그것은 벌써 그의 성소가 얼마나 성실했는지의 증거가 역력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들에게 대한 하느님 뜻을 반대한 것을 뉘우치며 뛰어난 신심을 보여 주며 선종했다. 알로이시오는 크나큰 설움을 맛보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이 이렇게 고운 것을 기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카스틸리오네를 떠난 후로 알로이시오가 자기 가족을 생각한 것은 오직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특히 보조 수사들과 즐거이 사귀었으며, 다 낡은 옷에 전대를 메고 자선을 청하러 나가기를 즐겨했다. 그가 천신론(天神論)이라는 책명으로 알려진 묵상 책을 쓴 것이 이때였다. 1586년 10월 27일, 그는 수련장과 함께 나폴리로 떠났다. 그러나 단독(丹毒)과 열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다음해 5월에 예수회의 로마 학교로 다시 파견었고 거기서 1857년 11월 25일에 첫 서원을 발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가 되어 공개된 장소에서 철학논문을 증명하고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토론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힘차게 그러나 절제 있게 자기 의견을 주장했으며 남의 말을 중단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1588년 2월과 3월에는 소품을 받고 더욱 더 순명의 덕을 닦는데에 힘썼는데 이는 누가 그에게 자기의 외부적 극기에 대한 열의에 반대하는 때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경향이 현저했던 까닭이다. 1589년 9월에 알로이시오는 총장 신부의 명령을 받고 자기 동생 로돌프와 만토봐 공작 사이에 일어난 솔페이노 성 쟁의(爭議)를 중재하기 위해 카스틸리오네로 갔다. 그는 특히 공작의 관대한 마음에 호소해 예수의 사랑을 위해 로돌프와 화해하기를 청했다. 그는 또한 악한 표양이 되었던 자기 동생의 비밀결혼을 우호적으로 승인하게 하는데에도 성공했다. 그런 다음 밀라노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갔고 거기에서 자기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리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수도 생활의 요람이었던 로마를 다시 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졌었는데 마침 총장 신부가 그곳으로 불러들여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시에나에서 수도회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알로이시오는 "너희들은 말을 듣지만 말고 오직 행하는 자가 되라"는 구절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주교들의 청으로 여러 주교직의 책무에 대해 연설을 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 굳게 하기 위해,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독언집(獨言集)과 성 베르나르도가 쓰신 아가(雅歌)해석과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특히 1590년과 1591년에 걸쳐 엄습했던 기아와 혹사병 때에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밝히 드러내어, 그는 처음에 성 식스토 병원에서 봉사하다가 다음에는 위로의 성모 마리아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도중에서 흑사병 환자를 만나 등에 업고 가다가 자기 자신이 병에 전염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3월 3일 이었다. 그는 석 달 동안을 병고에 시달리다가 하루는 밤새도록 일종의 탈혼 상태가 계속되는 중에 성체 축일 팔일 축제 내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해의 성체 축일 팔일 축제는 6월에 있었다. 그러나 팔일 축일이 다가오자 병세가 오히려 나아지는 것 같아 보여서 그의 고해 신부인 벨라르민 신부까지도 그 날 밤 그의 곁에 있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가 밤 열 시와 열 한 시 사이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다른 신부 두부노가 간호원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성모 영보 성당 지하실에 매장되었는데, 7년 후에 티베르가의 홍수로 인해 유해의 분배를 행했다. 나머지 유해는 같은 성당에 딸린 한 경당에 모셨다가 여러 번 옮겨 모셨고 나중에는 성모 영보 성당 자리에 새로 지은 성 이냐시오 성당에 모셨다. 시복은 바오로 5세 교황 때인 1605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1726년 4월 26일에 결정하고 같은 해 12월 31일에 선포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5년 6월 21일에 청소년의 주보로 결정되었는데, 이 칭호는 그 후 여러 번 확인 되었고 마지막으로는 1926년 6월 13일 비오 11세 교황이 재 확인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