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예타노 (St. Cajetan) 신부, 설립자
성인의 활동지역 : 티에나(Thienna)
성인의 활동연도 : 1480-1547년
성인과 같은이름 : 가예따노, 가예따누스, 가예타노, 가예타누스, 카예따노,
카예따누스, 카예타누스
티에나의 가스파르(Gaspar) 백작과 포르토(Porto)의 마리아(Maria)의 아들로
태어난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또는 카예타노)는 비첸차(Vicenza)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차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Rome)로 가서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받았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神愛會)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우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차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Verona)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설립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Paulus IV)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오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티우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설립하여 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
(Clemens VII)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티노회(Theatines)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 1530년 카예타누스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대적하여 훌륭한 싸움을 하였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과감하게 물리쳤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카예타누스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Montes Pietatis)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8월 7일, 나폴리(Napoli)에서 운명하였으며, 1671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o)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굳뉴스)
이 성인은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병 총지휘자였는데 성인이 두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 형제는 성실한 어머니 슬하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가예타노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될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24세에 이미 법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잠시 교회의 행정관으로 지낸후, 1516년 그의 나이 36세에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로는 예전보다 더 열성을 내어 자기 성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 이듬해 성탄절, 그가 말구유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아기예수를 그의 품에 안겨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151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시중해 드린 가예타노는 그 후 오랫동안
비첸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병자를 돌보기 위한 형제회를 세웠다.
또한 불치의 환자만을 수용하는 요양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자들과 지내고자
햇다.
그러다가 장상의 명령대로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그 간호에 종사했다.
그의 친척들은 그런 사업을 대단히 반대하며 그에게 갖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가예타노는
아무 말도 없이 겸손과 인내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를 만난 사람,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경건한 모습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가 미사 성제를 올릴 때의 모습은 마치 천국에서 움직이는 성인과 같았으며
그의 강론의 힘은 가장 완고한 죄인이라도 능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을 가졌었다.
가예타노는 인류의 구원 사업을 더욱 크게 넓히기 위해 성직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하고
이런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고 심사 숙고하여 열심히 하느님의 가르치심만을 구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을 법학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는 이를 기뻐하며 격려해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주교 가라파가 이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이분도 역시 성인이시지만 성격 상으로는 가예타노와 아주 다른 분이었다.
대단한 정력가로서 아무리 활동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분이며, 대단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가예타노에게 있어서는 수도회의 발전상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수도회 설립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황의 인가였는데 교황은 새 수도회의
인가를 대단히 주저했으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가예타노를 아는 많은 명망가들의 간절한 청원도 있고 더욱이 가라파 주교의
덕망을 보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이 회를 인정했다.
수도회의 창립자는 가예타노지만 명칭은 테아틴회(Theatines)라 했다.
이는 겸손한 가예타노가 그 회의 초대 총장인 가라파 주교의 거주지인 테아티노를
따서 그 회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라파 주교 역시 그 회의 창립자인 가예타노를 회의 창립자(사부,師父)로 섬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겸손한 분이었다.
회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예식을
성대히 하며 순명, 정결, 청빈의 서원을 지키며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는 곳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게 되어 각 지방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의 덕망이 나타났고 그의 열렬한 기도로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다.
가예타노는 쟁론을 조정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명한 재판으로 당사자들을
언제나 감복시켰다.
이런 성인에게도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1547년 나폴리 지방에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가예타노에게 불의 부당한 비방과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담당 의사의 모든 치료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다른 의사를 또 초청하려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가예타노는
"저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의사 한 분 이면 충부합니다"하며 거절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편안함을 찾지 않았다.
오직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고,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부덕함을 깊이 사과하고
그들의 후의(厚意)를 감사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47년 8월 7일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1671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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