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도미니코](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b/1308/0808St%20Dominic%204.jpg)
성 도미니코 (St. DOMINIC) 신부, 설립자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170-1221년
성인과 같은이름 :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펠릭스 구즈만과 복녀 요안나 아자의 아들인 성 도미니코(Dominicus)는 에스파냐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고, 1184-1194년 사이에는 팔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 듯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에서 카논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데 아베제도를 수행하여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Languedoc)로 가서 알비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시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Albigenses) 지역인 푸루일레에서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
(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도미니코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카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Toulouse)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Council of Laterano)에서 자신의 설교자회가
승인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로부터 승인을 받고
설교자회 즉 도미니코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는 한편 많은 회원이 입회하였고,
또 수도원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켰던 만큼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면에서 크게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수도회의 첫 번째 총회를 소집하였고,
그 이듬해 8월 6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는 1234년에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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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다.
그는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세속을 하찮게
여기도록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그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의 사람다운 모습을 보였다.
낮에는 형제들과 동반자들 사이에서 그만큼 다정한 사람이 없었으며, 밤에는 그만큼
온전히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온갖 탄원을 바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미니코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은 1233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공식적인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그를 아는 사람 9명이 볼로냐에 소환되어 증언했다.
그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도미니코가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증언은 초기의 다른 증거들로써도 확인된다.
그들의 증언에 초기의 다른 증거들을 보충하면, 도미니코가 얼마나 명랑하고 붙임성있는
사람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열렬히 기도했었다는 증언을 누누이 듣게 된다.
그는 흔히 밤새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그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 형제들이 잠을 깨기도 했다. 참으로 그는 쉽게 감동했다.
그는 전례 중에, 또는 스스로 설교할 때에도 곧잘 흐느껴 울곤 했다고 많은 증인들이
보고했다.
역사에 나타난 도미니코의 전성기의 모습은 친근하고 사랑스럽고, 남들과의 관계에서
솔직한 사람이면서도 무언가 결정할때는 단호하고, 교회와 복음의 진리에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며, 아울러 여러 가지 운동이나 공식적인 교회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참 가치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였다.
그는 분명히 괄목할 만한 용기의 사람이었으나, 나약하고 수줍은 사람들을 위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동료 한 사람은 "나는 내가 그렇게 좋아할 만큼 하느님께 봉사한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는 일찍이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더 영혼 구원에 대하여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이가 증언한 바와 같이 "그는 부자나 가난한 이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도미니코의 후계자가 된 복자 삭소니의 조르단은 도미니코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는 언제나 꿋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성격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성격이었다.
"기쁜 마음은 얼굴 표정을 기쁘게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도미니코는 인자하고 기쁜 표정을
통하여 자기 영혼의 평온을 드러내 주었다.
만일 하느님의 빛을 받아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그 목적에 매우 항구하
며, 충분히 숙고한 후에 공식으로 발표한 어떠한 결정도 좀처럼 변경하지 않았으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좋은 양심의 표시라 할 크나 큰 기쁨이 빛났기
때문에 "그의 밝은 얼굴 빛이 무색해 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쉽게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이 그를 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든지, 누구의 집에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있든지, 혹은 제후들이나
고위성직자나 그외 중요 인사들과 사귀든지간에 그는 언제나 영감적인 언어 구사가
풍부했고 유익한 일화가 넘쳐 흘렀으며, 어디에 있든지 말로도 행동으로도 복음의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가 선종했을 때 형제들은 그와의 이별을 아파했으나,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던 그의 약속을 굳게 확신했다.
13세기의 한 설교가는 도미니코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실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으며, 그후 수세기 동안 남녀 도미니코회원들은 똑같은 신념으로 한결같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도미니코의 이 세상 생애는 1221년 8월에 끝났으나, 남녀 수도자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기억은 살아 있다.
세상도 비록 그것이 그의 목소리인 줄을 모른다 하더라도 예나 다름없이 오늘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말한 바와 같이 "도미니코의 설교하는 목소리는 그의 제자들의
설교 속에서 오늘에도 여전히 들려오고, 앞으로도 계속 들려올 것이다."
도미니코가 생전에 시작한 위대한 이상은 교회 내 많은 남녀에게 전해졌을 뿐 아니라,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성 대 알베르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성 빈첸시오 페레르, 복된 프라 안젤리코, 사보나롤라, 교황 성 비오 5세, 리마의 성녀
로사,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빗지루 수사), 아시아의
수백명의 순교자들 그리고 세상과 교회의 생활과 사상과 신심에 여러 가지로 나름대로
영향을 끼친 많은 사람들의 업적을 통해서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멀리까지 전파되어 왔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www.op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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