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아우구스티노 (8월 28일) 주교 , 교회학자 , 교부

ohjulia 2006. 8. 28. 00:31
고향으로 ,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아우구스티노 (St. Augustine) 주교 , 교회학자 , 교부

    성인의 활동지역 : 히포(Hippo) 성인의 활동연도 : 354-430년 성인과 같은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인 로마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Monica)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적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e)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서를 들어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 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봉사하였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범사를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꼭 강론을 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정의를 위하여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청중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해서도 책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전해오는 저작으로는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는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적적 저서인 “고백록”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이 있다. 그는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린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학자이며 영성가였다. 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그가 얻은 기도의 체험은 어린 아이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어느날 배가 몹시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를 하고 나자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겁이 많았기에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청소년기부터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한 때는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의 덕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의 기도는 혼신의 정을 다 바쳐 의지를 움직일만한 강렬한 기도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들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있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그런 경우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제의 생활이 먼 훗 날에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다소 쾌락을 찾는 생활과 마니교 사상에 빠져 기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세례성사를 준비하던 중 이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건강의 임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나은 일이 있어 그는 기도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도 체험은 바로 자신의 회개였다. 그는 자기 회개의 은혜를 어머니 모니카에게 돌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원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홈에서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사상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록 지대하다. 하지만 성인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세인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이후로는 참회자들의 모범과 신앙의 변호자로 그리고 탁월한 사목자와 신비가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생애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처럼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