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며칠에 걸쳐 "십자가의 성요한의 생애와 영성"에 대한 글을 올리려
합니다. 괜찮을 런지요?
1.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생애(生涯)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하느님과 친밀하게 생활하였고 하느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였다.
- 신앙의 스승 ; 교황요한 바오로 2세의 사목교서에서 요한 데 예뻬스(Juan de Yepes; 십자가의 성 요한의 俗名)는 1542년에 아빌라에서 북서쪽으로 24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스페인의 황량한 암석지대인, 작은 마을 폰티브로(Fontiveros)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예뻬스 데 곤잘로(Gonzalo de Yepes)와 어머니 알바레스 까따리나(Alvarez Catalina)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Kieran Kavanaugh, The Classic of Western Spirituality - John Of The Cross Selected Writings, New York, Paulist Press, 1987, p.8.
1551년 온 가족은 메디나 델 깜뽀(Medina del Campo)로 이사했고, 여기서 성인은 고아들과 극빈자 자녀들을 위한 꼴레지오 데 독뜨리나 (Collegio de doctrina)에서 목공, 재봉, 미장 등의 기술과 정규학습을 받았다.
그후 자선 병원인 라스 부바스(Las Bubas) 병원에서 잡일과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으며, 병원과 환자들을 위해서 애긍 및 구걸을 하기도 했다.
참조 : 서덕교,『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한 정화의 단계에 대한 이해』
대구가톨릭대 석사논문, 1994, p.7.
“그들과 생활하면서 요한은 인생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자기 나름대로 민감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바로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가까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조 : 리차드 하디, 『無에의 追求』, 대구 가르멜 수녀원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0, pp.26-27.
1559년부터 이 지역에서 예수회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이 때부터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563년 21세의 나이에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이때 그는 ‘성 마티아의 요한’이란 수도명으로 착복한다. 신학수업을 받기 위해 살라망카(Salamanca)로 갔다. 당시 살라망카 대학은 스페인의 지적, 학문적 중심지였으며 거기서 그는 스콜라 신학을 중심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위 디오니시오, 대 그레고리오 등 교회의 신비주의적 전통과도 접했다.
1567년 살라망카에서 서품을 받고 첫미사를 드리기 위해 메디나 델 캄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두 번째 개혁 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그곳으로 온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만났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성서에 대한 깊은 신심과 특별한 심리학적 통찰을 겸비한 열성적인 영적 지도자로 기억되었다. 그는 성서의 대부분을 암기할 정도였으며 다른 책을 읽는 것은 드물었다.
요한에 대한 데레사의 사랑은 그녀의 저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요한의 세속적 위로를 이탈하려는 엄격함 때문에 데레사 수녀가 보낸 수많은 편지가 불태워졌지만, 그녀와의 특별한 우정 관계는 그가 언제나 그녀의 초상화를 지니고 다닌 것으로 알 수 있다.
비록 두 사람의 성격이 매우 달랐으나 -그녀는 때때로 그의 지나친 비 세속적인 것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신비적인 기도의 체험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한 가난이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를 하나가 되게 했던 것처럼 데레사와 요한을 하나가 되게 하였다;
Gloria Hutchinson, 『여섯 개의 길』, 차순향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1, pp.169-170.
이 만남은 성인의 생애 뿐 아니라 가르멜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때부터 십자가의 성 요한은 데레사 성녀의 개혁운동 데레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관상기도와 침묵을 생활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던 초창기 회규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 리차드 하디, 『無에의 追求』, 대구 가르멜 수녀원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0, p.41 참조. 에 동참하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때 이미 자진해서 가르멜회의 엄격한 옛 규율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1568년 두루엘로(Duruelo)에 개혁 남자 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하고 이 수도원을 축성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요한’(Juan de la Cruz; John of the Cross)으로 바꾸었다.
다음해인 1569년부터 개혁 가르멜 수도원의 수련장,아깔라(Acala)의 신학원장,
아빌라 강생 수녀원의 고백신부 등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은 개혁의 진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화 가르멜 수도회와 갈등과 마찰은 심화되어 갔다. 완화 가르멜 수사들은 ‘개혁 운동을 혁명이나 반란 또는 위험하고 방자한 소행’으로 보았다. 같은책, p.38. 따라서 개혁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들의 특별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577년, 마침내 십자가의 성요한은 납치를 당하여 9개월 동안 똘레도(Toledo)의 가르멜 수도원 지하 창고에 억류 당한다. 이때 성인은 암흑과 번민, 고통의 지옥같은 그 곳에서 극도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민 그리고 하느님의 전면적인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체험을 상징하는 것이 십자가 십자가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서 믿음의 지혜, 즉 ‘무지’의 발판이요 문이었다.
십자가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지팡이이며(산길 2권 7,7) 요한에게는 ‘길’이요 체험의 근본이 된 상징이었다;
호안 가렡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 p.135 참조. 이다.
이 무섭고도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였을 때 신앙의 새로운 삶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고 이 체험은 ‘어둔밤’을 묘사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똘레도를 탈출한 후 여생의 대부분을 안달루시아(Andalusia)에서 보낸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거기서 많은 저술활동과 중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1591년의 관구 참사회에서 총대리 신부와의 마찰로 인하여 모든 직책에서 면직되었다.
그해 그는 건강의 악화로 우베다(Ubeda) 수도원으로 옮긴 후 거기서 49세의 일기로 동료 수사들 사이에서 생애를 마쳤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을 떠난 후 1593년 클레멘스 8세의 칙서에 의해 개혁 가르멜회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1675년 끌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에는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참조 : Jordan Aumann, 『가톨릭 傳統과 그리스도교 靈性』, 이홍근-이영희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1,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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