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영성의 향기

3. 십자가 성요한이 영향받은 전통적 영성

ohjulia 2006. 10. 9. 03:14

3. 십자가 성요한이 영향받은 전통적 영성

매우 독창적이라 말할 수 있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사상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체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에 변함없는 보증에 의존하고, 이것은 마치 성서도 전승에 의해 이해하고자 한 것과 같다. 이는 충실한 사목자로서의 그의 삶 안에서 교회 안의 성실성으로 드러난다.
살라망카에서 수학한 후 십자가의 성 요한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중심으로 교육받았으나 그는 위 디오니시우스와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작품도 읽었다. 위 디오니시오(5세기의 익명의 저자)와 닛싸의 그레고리오(335-396); 그들은 아뽀화띠까(언급을 피하면서 암시하는 신학) 또는 부정신학파(否定神學派)에 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성요한에게는 선배격이 된다고 할 수 있고 이 파의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 실재하는 것에 대해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다고 먼저 부정하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출발하는 편이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知있는 無知의 길) 십자가의 성요한은 그 외에 영국 신비가들의 작품, 그중에서도 저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지의 구름』이라든가 『라인 지방의 신비가들』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또 저 유명한 에카르트(1260-1327)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주장한 ‘순수하고 적라한 무’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신앙 체험과 매우 비슷하다; 호안 가렡드,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 pp.18-19 참조.
그러나 성 요한에게 가장 영향을 준 작가는 - 비록 그가 베르나르도, 로이스브루크, 까시아노 빅토르 회원들, 오수나 및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작품들에 정통했음은 확실하나 - 타울러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맹목적으로 다른 이들을 모방하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모두 그 자체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Jordan Aumann, 같은책, p.279.


3.1. 교부들 참조 (알렝 들레, 『신앙의 신비-십자가 성 요한의 신앙』, 정대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p.102 ).



전통적으로 영성생활의 여정은 세가지의 단계
(참조 : Karl Rahner, 『靈性神學 論叢』, 정대식 역, 가톨릭 출판사, 1992, pp110-116.)로 구분되어 왔다. 정화, 조명, 일치(1고린 2, 6-16, 에페 4, 13-15)(어린이들, 성숙한 사람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교부 시대 끌레멘스(처음으로 영적 진보에 대한 언급), 오리게네스(영적 진보의 세 단계 즉,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토마스 아퀴나스(초보, 진보, 완성) 등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단계의 구분은 회심이라는 결단의 행위를 통하여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회심에 뒤 따르는 삶이 성장과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인이다. 성 요한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독백>(Solique)에서 하느님이 드러나게 되는 암흑의 광선에 관한 디오니시오적인 테마를 가지고 완성시키고 있다. “이성이 하느님께 대한 높은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관상을 일컬어 신비신학이라 부르니, 하느님께 대한 그윽한 지혜를 말한다. 지혜를 받아 들이는 이성 자체도 그윽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 디오니시오는 ‘어둠의 빛이라 했다” 산길 2권 8장, 6.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서와 마찬기지로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도 영성생활은 점차 진보해 나간다. ‘영혼의 질량에 대하여’에서는 네가지 단계가 언급되어 있으며 그 첫단계는 살아 있는 믿음이고 마지막 단계는 관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의 관상은 영성 생활의 절정에 나타난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피조물들에 대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느님께로 높아 간다.
이렇듯이 십자가의 성요한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음은 아마도 살라망카대학에서 받은 신학교육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 요한이 합리적인 차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끊임 없는 기도를 통해서 재발견 했던 것은 영성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오가 성 요한의 작품들에 끼친 영향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의 용어를 빌려서 정화, 조명, 일치라는 연속적인 세 과정으로 영성생활의 단계를 말한 것이다. 정화에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론은 계시와의 일치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서 디오니시오적인 전통에 기록되어 있다. 즉 수동적 정화는 영혼의 어둔 밤에서 설명되고 이 단계에서 하느님은 영혼이 감각적 측면과 영적 기능에서 자신을 정화하려는 노력을 완성하신다. 여기서 영혼은 디오니시우시가 ‘어둠의 광선’이라 표현하고 성 요한은 ‘신비신학’이라고 칭하는 어두운 관상에 점진적으로 이르게 된다고 한다.
교부들의 신비주의적 전통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서, 따라서 간접적이긴 하지만 매우 중대한 방법으로 믿음에 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론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3.2. 레낭(Rhenans)학파 참조 : 알랭 들레, 『신앙의 신비』, 정대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 pp.110-118; 여기서는 주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타울러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레낭학파 특히 타울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여기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타울러의 공통된 신학적 주제들을 간략히 살펴 보겠다.
타울러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관계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공통된 테마들을 가지고 있다.
- 영을 텅비게 만들고 헐벗게 만든다는 견지에서 명백한 관점의 초월에 관한 테마.
- 태양이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바라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지혜도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인간이나 천사들의 지혜로는 통찰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신비스런 하느님의 암흑에 관한 테마.
- 다른 모든 빛을 흡수하는 태양의 빛에 관한 테마.
- 어둡고 침묵하고 휴식하는 관상에 관한 테마.
- 정화 작용을 하는 밤에 관한 테마. 여기서 타울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밤의 이론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구자임이 분명하다.
- 불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변모시키는 불타는 장작에 관한 테마.

3.3. 스페인의 신비주의

이제 부터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사상에 보다 접근하는 의미에서 스페인의 영성주의자들과 그 동시대인들의 영향에 대해 알아 보겠다. 우선 여기서는 그 시대를 16세기로 고정하고 16세기의 전통을 - 특히 대 데라사와 아빌라의 요한과 라레도를 중심으로 - 부분적으로나마 검토하여 보겠다.
가르씨아 씨스네로스(G. Cisneros)와 오수나의 프란치스꼬(Francois d'Osuna) 그리고 그라나다의 루도비꼬(Louis de Granada) 등은 디오니시오적인 경향성을 띠고 부정신학적인 관점에서 영성을 접근해 나아 간다. 그들은 이러한 사상 아래 관상과 침묵 그리고 선(善)을 향해 마음을 열 것을 촉구한다.

3.3.1. 성녀 대 데레사
성녀 대 데레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심취했던 스페인의 신비주의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녀는 관상을 완덕의 지름길로 생각했는데 <이 길은 판단이 개입될 수 없는 길>이며 그러나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불가능한 길임을 알고 있었으며, 실상 이 사실에 대해 그녀는 괴로워 했다. 성녀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좋아 했으며, 이처럼 인간성에 비중을 두는 것은 가장 차원 높은 관상에 장애물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상을 하는 자들에게는 꼭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상은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서는 그녀가 십자가를 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행복한 체험인 것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성 생활을 활기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하느님의 선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관과 닮은 점 내지는 관련성을 파악하게 된다.
‘깔멜의 산길’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일곱 궁방에 대한 이미지 산길 2권 11장, 9-10.
는 성녀 데레사에게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 요한이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 요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영향은 ‘사랑의 산 불꽃’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서 성 요한은 성녀 데레사의 심장 찔림을 접할 수 있었던 은혜로 묘사하고 있다. 불꽃 2, 9.

3.3.2. 아빌라의 요한과 라레도
한편 수동적인 정화에 관한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가장 친근했던 아빌라의 요한(Juan de Avila)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라레도(Berndin de Laredo)와의 깊은 관계도 십자가의 성요한이 ‘깔멜의 산길’을 쓰기 위해 차용한 ‘시온의 산길’이라는 제목 외에도 말씀의 육화와 삼위 일체의 신비에 관한 부분에서도 차용해 온 것이 몇가지 있음이 틀림없다.

3.4. 스콜라 학파적인 전통

‘영혼의 노래’의 서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의 안나 수녀를 향해 스콜라 학파에 의존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아직도 여기서 영혼과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에 관한 스콜라 학파의 이론을 몇가지 더 지적하고자 하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헛되거나 쓸데 없는 짓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스콜라 학파의 신학은 연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콜라 학파의 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신비주의 신학에선 찾아볼 수 없는 사랑에 의한 진리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맛볼 수도 있게 된다. 노래 4.
이미 성 요한은 그의 작은 논문을 쓰느라고 성 토마스를 인용하였고, 그의 대학 시절 동안에는 토마스의 신학대전을 적어도 두 번 읽었다. 그러므로 성 요한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많다. 성 토마스의 영향은 특히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어둔밤」의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다리의 열층계’라는 비유에서 나타나듯, 하느님과의 사귐이 진짜라면 그 특성이 영혼을 동시에 높에고 낮추고 하는 것, 이 길에 있어서 낮춤은 곧 높임이요, 높임은 곧 낮춤이기 때문이다. 완덕의 상태란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자기 자신을 없앰이어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밤 2권 18장 참조.
끝으로 종합해 보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자신의 어떤 고립되고 순수하게 독창적인 사고에서 저술한 것이 아니라, 성서나 어떤 원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며 또 그것들이 모여 있는 신비의 종합이다. 이것을 이어 받고 있는 수 많은 사상가와 영성가들이 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요한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음은 그의 독창성과 예외적인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산만한 전승의 수 많은 요소들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였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 에밀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