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브루노 (10월 6일) 사제, 설립자

ohjulia 2006. 10. 6. 10:09
 성 브루노
 

    성 브루노(St. Bruno ) 사제, 설립자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032?-110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성 브루노는 독일 쾰른(Kol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구니베르토 학교를 거쳐 프랑스의 랭스(Reims)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 와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시 1056년에 랭스로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 107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때 그는 성직매매로 랭스의 주교좌를 획득했던 자신의 대주교 마나세(Manasses)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브루노는 그를 고발하고 그의 직책에서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성취하였으며, 이를 눈여겨 본 랭스의 교구민들이 그를 대주교로 원하였으나 그는 은수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는 1082년 마침내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투스 (Robertus)의 지도하에 은수자가 되었지만, 1084년에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그르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후고(Hugo)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에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활하였다. 이것이 곧 카르투지오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였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1090년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의 부름을 받고 로마(Rome)로 갔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개혁 등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는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에 정착한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칠리아 (Sicilia)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 Torr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Paulus)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축일이 10월 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 *********************************************************************************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성인은 '한 번도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개혁한 적이 없는 수도원’을 창설했다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분명히 창설자와 회원들은 이렇게 지나친 찬사를 거절하겠지만 성인은 고독과 참회 생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브루노는 쾰른에서 태어났으며 랭스에서 유명한 교사가 되었고 45세에 대교구의 사무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지지하여 성직자들의 타락상에 맞서서 투쟁했으며, 타락한 자기의 대주교인 마나세를 퇴임시키는 데 참여했다. 이렇게 애쓴 보람도 없이 브루노는 자기 집안이 약탈당하는 괴로움을 겪었다. 고독과 기도 생활에 대한 꿈을 가졌던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자기와 함께 은수자로 생활할 것을 권유했다. 얼마 후 그는 장소가 부적당하다는 것을 느끼자 친구를 통해 약간의 토지를 기 증받았는데 이곳은 나중에 그의 수도원 창설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카르투시안이란 말에서 유래한 샤르트뢰즈에 있다. 삭막하고 험악한 지형과 나쁜 기후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길 등은 침묵과 가난을 가져다 주었으며 소수의 인원만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독방들과 기도실을 건축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고독한 가운데 지내며 대축일에만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의 주된 일은 성서 사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부르노의 성덕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보좌로 삼고자 그를 로마로 불렀다. 교황이 로마를 떠나 피신해야 했을 때 브루노는 또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주교좌도 거절한 뒤에) 칼라브리아의 광야에서 말년을 보냈다. 카르투시안들은 널리 알려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브루노가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적은 없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는 1674년에 그의 축일을 온 교회에 공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