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10월 10일) 신부 , 총장

ohjulia 2006. 10. 10. 13:49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St. Francis Borgia) 신부 , 총장

    성인의 활동지역 : 아라곤(Aragun) 성인의 활동연도 : 1510-1572년 성인과 같은이름 : 보르자,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 (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고,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Rome)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처음엔 국가의 중신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다해 총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뒤에는 수도자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나중에는 예수회의 제3대 총장이 되어 그리스도교회에 대해서도 많은 공로를 세운 성인이다. 그는 1510년 스페인의 발렌시아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영주(領主)였고, 어머니는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또 어려서부터 경건한 성격으로서, 놀 때도 언제나 전쟁 놀이보다 미사 성제의 흉내를 더 즐기는 편이었다. 19세부터 궁중에 들어가 시종(侍從)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충실한 근무 태도로 말미암아 당시 유럽의 반을 점령하고 있던 황제 가롤로 5세와 그의 황후 이사벨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마침내 이사벨라의 호의로써 1529년에 그녀의 총애하는 시녀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또한 후작(侯爵)의 칭호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이 엘레아놀 부인도 남편 못지 않게 신앙이 깊은 부인이었으므로 그 가정은 늘 봄날처럼 온화하고 16년 동안 5남 3녀를 낳아서 기르는 등 아무 부족함 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데 뜻밖에 젊은 황후 이사벨라가 서거하여 국장(國葬)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이의 집행 위원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가 유해를 그라나다에 있는 황실의 묘소에 매장함에 앞서 옛 풍습대로 관을 열어본 결과, 생존시에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미인이었던 황후의 꽃과 같았던 얼굴이 처참하게 변해져 그의 인생의 무상신속(無常迅速), 세상 사물의 허무함을 깨닫게 할 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구도심(求道心)을 갖게 되어, 이 세상에서 가치있게 살려면 다만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 뿐이라 생각하고 만일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자신도 반드시 수도원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굳게 맹세했던 것이었다. 훗날 그는 그 날을 회고하면서 “이사벨라 황후의 서거는 실로 나의 영생(靈生)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황제는 프란치스코의 출가 수도(出家修道)의 결심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와 같은 충신을 상실한다는 것은 국가의 일대 손실이라 생각하고, 방지책으로 그를 카탈로니아 주(州)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그 당시 황제 대리라 할만한 격식을 갖춘 현직(顯職)이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이미 조금도 현세의 영달을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충신이던 그는 황제의 은혜와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이를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카탈로니아 주에는 당시 해적의 습격을 빈번히 받아 양민 중 생명이나 재산을 빼앗기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총독이 되자 경계를 엄중히 하고, 해적들을 체포하면 중형에 처했으므로 얼마 안 되어 그 피해도 아주 자취를 감추게 되어 백성들은 평화를 즐길 수가 있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은덕을 칭찬하는 소리는 사방 곳곳에서 들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공인(公人)으로서는 황제 대리의 자격으로서 종종 성대하고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고 많은 빈객을 초청하여 그 권위와 세력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마치 수도자처럼 검소하고 가난한 생활을 택했다. 그는 그러던 중에도 하루 속히 이 같은 높은 지위를 떠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총독으로 6년을 지낸 후 황제에게 사직시켜 줄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간신히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다시 그때부터 2년이 지난 후로써,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간디아 영주가 되는 허락을 황제로부터 얻은 1543년에 이르러서였다. 1546년에는 사랑하는 아내 엘레아놀도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황후의 서거 후 마음먹었던 맹세를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된 프란치스코는, 즉시 예수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게 입회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허락을 내렸다. 그래도 8명의 자녀가 있고 게다가 광대한 영토와 백성을 소유하고 있던 몸으로서 온갖 사무를 처리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는 교황의 특별한 허가를 얻어 우선 순명과 정결의 서원만을 발하고 청빈 서원은 일체의 사무 처리 후까지 연기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장남에게 자기의 뒤를 상속시키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각기 뒤처리를 해 준 다음, 1550년 드디어 로마에 가서 이냐시오의 지도하에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식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숨은 생활을 동경하며 지상의 온갖 영예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랑곳없이 지냈다. 또 그는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고, 게다가 또 지극히 겸손하여 자기 이름에 늘 ‘가난한 죄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율리오 3세가 그를 추기경에 승진시킨다는 소문을 듣자, 겸손한 그는 도리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피하여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551년 가롤로 황제의 승인을 얻어 신품 성사를 받아 사제의 자격을 얻었다. 본래 황제 대리의 요직에 있었고 명성을 천하에 떨친 바 있는 프란치스코의 서품은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강론을 들으려는 군중은 사방에서 큰 파도처럼 모여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첫미사에 참여한 자는 1만 2천명이었고, 그때 그의 손으로 영성체 한 사람은 1240명에 달했다고 한다. 곧 그는 스페인에 있는 예수회의 관구장에 임명되었다. 예수회는 종래의 수도회와 다소간 다른 점이 있었던 관계로, 이를 오해하고 비난 공격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아니 어떤 때는 가롤로 황제까지도 모함의 말을 듣고 그 수도회에 대해서 의아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이를 안 프란치스코는 황제를 알현하고 일일이 설명하여 그 오해를 깨끗이 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2대 예수회 총장 레이네즈의 초청에 응해 로마로 가서 그를 보좌하며 수도회의 발전에 전력하고 있었는데, 레이네즈가 서거하자 그 뒤를 이어 3대 총장에 추대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평소 고행에 열심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극히 준엄했으므로, 총장이 되어서도 회원들에 대해서 반드시 엄격했으리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매우 관대하고 아버지와 같은 온정을 베풀고 그 뿐 아니라 각 수도원의 원장들에게도 늘 온순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라고 가르칠 정도였다. 그가 총장직에 재임한 7년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했고, 1572년에 비오 5세 교황은 스페인에 보넬리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를 그의 수행원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로마로 돌아온 이틀만에 곧 중태에 빠져 영원한 행복을 받기 위해 세상을 떠났다. 때는 1572년 10월 1일,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의 축일은 교회의 결정대로 10월 10일에 지내게 된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들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창설자로 불린다. 그의 유해는 처음 로마에 안장되었으나, 1617년 이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원들의 서원소에 옮겨져 안치되었다. 그는 1670년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