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데레사 (St. Teresa) 설립자 , 신비가 ,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아빌라(Avila)
성인의 활동연도 : 1515-1582년
성인과 같은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알론소 산체스 데 세페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베아트릭스 다빌라 이
아우마다의 딸이다.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1532년에 아빌라에 있던 수녀원을 떠나야 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갈망해오던 그녀는 1536년에 아빌라에서 카르멜 수녀가 되어
다음 해에 서약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538년에 수녀원을 떠났다가 1540년에
다시 들어갔다.
그녀는 1555년과 1556년 사이에 환시를 보았고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는데,
성 베드로 알칸타라의 영적 지도를 받을 때까지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성 베드로(Petrus)는 그 모든 환시가 진실한 것임을 그녀에게 확신시켰다.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그 당시의 다소 느긋한 수도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봉쇄 생활을 원하는 수녀들을 위하여 아빌라에 성 요셉 수도원을 세웠다(1562년).
1567년 카르멜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다른 수도원을 세우도록 그녀에게 허락하였으므로, 메디노 델 캄포에 제2의 수도원을
세울 때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이란 젊은 수도자를 만났으며,
1568년에는 두루엘로에 남자를 위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개혁 카르멜 수도원이다).
그녀는 에스파냐 전역을 다니면서 카르멜의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575년의
총회는 그녀의 개혁 그룹을 제한하였다.
1580년까지 카르멜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투쟁은 격심하였다.
이윽고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는 맨발의 개혁파를 독립 관구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테레사는 수많은 편지와 책을 지었는데, 이 모두는 영성 문학의 고전이 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자서전”(1565), “완덕의 길”(1573), “영혼의 성”(1577)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신비가 중의 한 분인 성녀 테레사는 지적이고
빈틈없는 사람이었으며, 매력적이나 깊은 영성을 지녔으므로 차원 높은 관상생활과
더불어 수준 높은 활동생활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던 위대한 성녀이다.
그녀는 에스파냐의 알바 데 토르메스에서 선종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하여 1622년에 시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교회의 여성으로는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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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는 혼란과 개혁의 시기인 16세기에 살았는데, 그 시대는 정치적,사회적,
종교적으로 변동과 탐험의 시대였다.
그녀의 일생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절정에서 시작하여 트렌트 공의회 직후에 끝났다.
하느님께서는 데레사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녀가 그 은총 안에서,은총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고 교회와 세상에 그 흔적을 남기도록 하셨는데,그 은총은 세 가지이다.
즉 그녀가 여자라는 것과 관상적이라는 것, 그리고 활동적인 개혁자라는 것이다.
데레사는 여자임에도 그 시대의 남자들 세계에서 까지 자신의 두발로 버티고 섰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갈멜 수녀원에 들어감으로써
’그녀 자신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신비에 쌓일 만큼 침묵 속의 인물은 아니었다.
아름답고,재주있고,활달하고,붙임성 있고,정이 많고,용감하고, 열정적인 그녀는 매우
인간적이고 여성적이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역설적인 신비를 지니고 있다.
현명하면서도 실제적이고,영리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잘 조화시키며,신비적이면서도
정력적인 개혁자였다.
그녀는 거룩한 여인이며 지극히 여성적인 사람이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위한’여인, 기도와 규율과 연민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께 속해 있었다.
그녀 자신의 회개는 밤을 새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서 겪는 투쟁으로서, 계속되는 정화와 고통이 내포되어
있다.
그녀는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받고 그릇된 판단을 받는 등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도 끝까지 용감하고 충실하게 투쟁했다.
그녀는 또한 자기 자신의 평범한 기질과 병 그리고 자신의 거부 반응과도 싸워야 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는 기도와 생활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기도와 관상에 대한 그녀의 저술은 힘에 넘치고 실천적이며 은총으로 가득 찬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진정 기도의 여인이었고 하느님을 위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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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역시 동명의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데레사라고 부를 때도 있는데 사실 그녀는 이름에 못지않는 드문 대 성녀이며
교회와 종교를 위한 발군 공적(拔群功績)을 남긴 분이다.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귀족으로 자녀들을 모두 가톨릭 전신에 입각하여 교육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독서를 즐기는 분으로 자녀들에게도 유익한 독서를 시키기위한
좋은 서적을 마련해 주었는데, 데레사는 일곱 살 때부터 네살 위인 오빠 로드리고와
같이 성인 행적을 읽으며 순교자들의 장려한 죽음을 보고 매우 감동되어 어린 마음에
자기도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뜻에서, 부모의 반대를 꺼려 몰래 집을
나갔는데 다행히 큰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다시 끌려왔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데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돌봐주는 어머니도 없고, 또 많은 사람들의 나쁜 표양 때문에 세속적으로
흘러감을 염려한 아버지는그녀가 14세때, 아우구스티노 수녀원에 위탁하여 교육을
시켰다.
데레사는 그 수녀원에서 자라며 차차 마음이 바로 잡혀가는 중에 병에 걸려 친가에
요양하러 가게 되엇다.
그때 신심이 두터운 큰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는 데레사에게 다정스러이 세상의 허무함을
설명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요양하면서 성 예로니모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세때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수련자가 된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장상들은 환자수녀를 간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환자의 병은 아무도 그 근처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종류의 병이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잘 참고 감정을 억제하며 그 불행한 환자 수녀를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성의에 맞았음인지 그때부터 데레사는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감미로운
위로를 맛보았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환자를 간호하는 것이 매일의 기쁨이었고 나아가서 자기도 그러한
병에 걸렸으면 하고 원하게되었다.
그 기도가 허락이 되었음인지 병석에 눕게 되자 아버지는 다시 그 딸을 집에 데려다
요양시키기로 했다.
데레사는 투병 8개월 만에 겨우 건강이 회복되어 수녀원에 갔으나 역시 몸의 허약을
면할 길 없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고민에 싸였다.
즉 완덕에 나아갈 열렬한 동경을 품고 수녀원에 들어왔는데, 원래 수녀들의 수도 정신이
이완 되었음인지, 혹은 경제적 관계로 외부와 교제를 하지 못한 탓이었는지, 너무나
속화되어 있어 환멸과 비애와 불만을 초래했다.
그러던 중 데레사는 2가지 이유로 일대 각성할 기회를 얻었다.
그중 하나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자기도 모르게 감동되어 자기의 냉담한 처지를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요, 또 하나는 열심히 읽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비추어 자기 영혼의
한심스러운 처지를 발견하고 갑절의 열심을 분발시켜야 되겠다고 통감한 사실이다.
그때부터 영적(靈的)으로 다시 살아났다.
고해 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때까지 내 생활은 내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의 내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자기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레사의 신비 생활의 기본이다.
그녀는 별로 학식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저서는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존중되고 있다.
이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심오한 신비계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기록한 책으로서, 말하자면 데레사 안에 계신 주님 자신이 적으신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신비 생활에 관한 저서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명한 ’영혼의 성’은
수도자로서 반드시 볼 만한 것이다.
데레사는 영혼을 신비계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밖으로는 가르멜회 개혁을 도모했다.
평소에 냉랭하고 신심이 박약한 수녀들은 사회인과 합류하여 데레사와 그 동료들을
과격파들이라고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래서 데레사 등은 지극한 곤경에 봉착했는데, 본래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는
법인지라, 마침내 그 개혁은 성공하여 각처에 있는 여자 수도원은 물론, 남자 수도원에
까지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그녀는 수도원 창설 내지 개혁을 위한 의논 상대로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 하느님께서도 데레사를 기꺼이 여기사 가끔 신기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도록
해주셨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된 그녀의 성상에 표시된 바와 같이,
그녀의 가슴에 박힌 성흔(聖痕)도 역시 그 일례이다.
즉 그녀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손에 불 창을 든 천사가 나타나 사정없이 그녀의
심장부를 찔렀다.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녀의 가슴이 타 없어질 듯이 우러남을
느꼈다.
그것에 대해 정신적 체험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데레사가
육체적으로도 그 상처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신비 생활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는 길이 아니고
가시덤불이 가로놓인 험악한 길이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가 9, 23)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녀에게 여실히 적용된 셈이다.
고행, 겸손, 희생 등은 그녀가 평소에 지닌 십자가였다. 그녀는 그런 십자가를 열애했다.
이는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습니다’고 한
그녀의 말이나, "데레사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녀를 학대하거나 또는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고 한 아빌라의 주교의 말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데레사는 극기 수덕의 길을 걷는 도중 1582년 9월 2일, 67세에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눕고,
뒤이어 10월 4일 밤중에 사랑하는 하늘의 배필을 만나 뵈러 영원한 길을 떠났다.
임종이 임박하자 그녀는 주님과 영원한 일치를 할 기회가 왔음을 즐겨 기뻐하며,
얼굴에 희색을 감출 수 없어 몇 번이나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를 거듭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622년 사후 40년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후부터 세계적으로 데레사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녀를 교회의 여 박사 또는
신비 신학 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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