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합시다.

ohjulia 2007. 6. 2. 10:54
2007년 6월 2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집회서 51,12ㄷ-20ㄴ

12 제가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오리다.
13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14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15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 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지혜 안에서 기뻐하였다.
내 발은 올바른 길을 걸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아다녔다. 16 나는 조금씩 귀를 기울여 지혜를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위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17 지혜를 통하여 진전을 이루었으니, 지혜를 주신 분께 영광을 드리리라. 18 사실 나는 지혜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였고 선을 추구해 왔으니,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19 내 영혼은 지혜를 얻으려 애썼고, 율법을 엄격하게 실천하였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펼쳐 들고 지혜를 알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20 나는 내 영혼을 지혜 쪽으로 기울였고, 순결함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였다.


복음 마르코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어떤 깊은 산중에 할아버지 혼자서 외롭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어서 삶이 무척이나 외로웠지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곰과 친구가 되어 둘은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그들은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곰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는 너무나 힘이 들었지요. 할아버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곰은 점점 멀리 쳐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앉아서 좀 쉬든지 아니면 나무에 기대서 낮잠 좀 주무세요.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가 옆에서 지켜 드릴게요.”

이러한 배려에 할아버지는 감동을 했지요. 그리고는 큰 나무에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곰은 충직하게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지켰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할아버지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콧잔등에 앉았습니다. 곰은 재빨리 뛰어와서 손을 저어 파리를 쫓았지요. 하지만 파리는 잠시 뒤 또 다시 날아와서 할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것입니다. 곰은 할아버지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자신의 큰 손바닥을 들어 숨죽인 채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습니다.

‘이 못된 파리, 내 기필코 혼내주고 말 테다.’

곰은 할아버지의 볼에 앉은 파리를 잘 조준해서 있는 힘껏 손바닥을 내리쳤습니다. 그 결과 파리는 죽었지요. 하지만 그 손바닥에 맞은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곰은 할아버지를 위한다고 행한 행동이지만, 이러한 행동이 절대로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 될 수 없겠지요. 따라서 아무리 선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서 풀뽑기나 청소 같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자주 웃지못할 일들이 생기곤 해요. 글쎄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빗자루와 호미를 들고 아이들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한다고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들이 하겠다는 것이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분명한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 행동이 꼭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틀리고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또한 숫자상으로도 자신들이 훨씬 많으니 예수님과의 언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었지요. 바로 자신들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말을 바꿔버리는 그들이 결코 진리 자체이시며, 사랑 가득하신 주님의 진실성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 정말로 그들을 위한 사랑이었는지를 잘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나만을 위한 사랑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기심을 이제는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합시다.



아내를 위한 마지막 콘서트('좋은 생각' 중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피아니스트 어빈 니레지하치는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놀라운 음악 신동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명성을 이용해 부자가 되려 했고, 매니저는 어머니보다 더한 흥행사로 돈벌이가 되면 어떤 무대라도 섭외했다. 하지만 그는 사기를 당해 지하철역에서 노숙하며 연주 여행을 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생황에 지쳤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973년 5월 6일, 그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콘서트홀에 나타났다. 한때 음악 신동이라고 칭송받았지만 뉴욕 부두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다 노숙자로 전락한 그가 그토록 오랜 침묵을 깨고 피아노 앞에 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젊은 시절 단 한 번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엘시 스완이라는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연히 재회한 그녀는 79세의 노파가 되어 있었는데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다. 니레지하치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70세 노구를 이끌고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었다.

우연히 그 연주회에 들린 CBS 레코드사의 테리 맥네일은 그의 신들린 연주에 넋을 잃고 허겁지겁 카세트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니레지하치의 실황 음반이자, '전설의 음반'으로 불리는 '두개의 전설'이다. 그 이유는 니레지하치가 다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숨을 거두었고, 그는 더 이상 연주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