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츠커는 바알 셈이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잠언 3:6)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그랬듯이, 종교적인 헌신과 일상 생활의 필요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생활 양식
(modus vivendi)의 발전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세상 일에 대한 참여, 경건과 편의주의, 성스러움과 자기-이익
사이에는 구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중심되는 딜레마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심미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심미적"이란 말은 미(美)에 대한
인식에 그치지 않고 넓은 의미로 만족을 뜻한다. 윤리적인 삶의 근엄함에 반하여 심미적인 삶은
도덕적인 책임을 행복의 추구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
키르케고르는 "모든 것이 인간을 이 딜레마 앞에 정면으로 서게 만든다"라고 강조하였다.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훌륭하고도 가혹한 것은 선택이다, 자유이다. 만일 그대가 이것을
간직하고 보존하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같은 순간에 그것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무조건으로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리되 그것과 함께 그대 자신까지 바치는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주어진 무엇이 그대를 유혹하고 그대가 유혹에 넘어가 이기적인 욕망으로 그 선택의
자유를 누리려 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자유를 잃는다.
그리고 그대가 받게 될 형벌은 혼돈 속에 휩쓸려 들어가 스스로 선택의 자유를 지녔노라고
자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내려진 저주받은 심판이다.
- 키르케고르의 [일기장]에서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따라서,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분의 나라…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확인하는 약속의 열쇠이다! …왕의
개인 저택에 출입하는 모든 관리들이 신분을 보장받는 표를 지니고 있듯이… 참으로 기독교에
헌신한 사람은 모두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표로 분간된다. 어중간한 것은 무엇이거나 아직
기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 섬기는 일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생전에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불리는 내가 누군가를 '이것도 저것도'로 섬길 수는 없지 않은가?"
"참된 하느님 섬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그러나 이런 예배는 인간의 입맛에 결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사제들과 신학 교수들은 다른
종류의 하느님 예배"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스스로 불신앙에
정면으로 맞서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오호라, 이것이야말로 가장 악화된 불신앙이 아닌가?
진리를 담은 종교가, 특히 기독교가 목적하는 것은 인간을 전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당장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을 향하여 철저히 포기하고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신과 씨름하게 하는 것이다.
마르텐센 교수는 고인이 된 마인스터 감독을 "진실한 진리의 증언자"라고 칭송하였다.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공개적인 반발을 야기시켰다. 그는 오랫동안 마인스터 감독의 설교야말로,
우리들 인간에게 시효가 지난 듯이 보이는 어떤 기독교적인 요소,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쾌락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자발적인 자기-포기와 자신을 미워하고 교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이를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요소를 슬쩍 뛰어넘고 마는 약음(弱音)
페달이요 이음줄이며 묵음(默音) 부호라고 생각하였다.
키르케고르가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면 마인스터의 설교문 곁에
신약 성경을 펼쳐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리의 증언자란, 그의 삶이 시종일관 이른바 '쾌락'이라는 것과는 생소한 그런 사람이다"라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하였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이질적이다. 따라서 '증언자'도 이 세상에 대한
이단자로, 자기를 포기하고 고통을 받는 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마인스터 감독의 설교는 쾌락주의자들이 스토아 철학에 관계하듯, 그렇게 신약 성서의 기독교에
관계한 것이다."
코츠커의 설교도, 그가 철저히 유다교적이라고 생각한 요소들, 비록 삶을 교만하게 만든다 해도
견뎌야 하는 자발적인 자기-포기를 슬쩍 넘어간다거나 생략해 버리는 자들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다만 낡은 것을 버리고 그것을 멀리 던져버리는 자만이 하시드이다라고 코츠커는 가르쳤다.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고 세상의 오점이 묻지 않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고 교리다"라고
키르케고르는 썼다.
누구이거나 거짓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별거시켜야 한다고
코츠커는 가르쳤다.
코츠커는 우울증으로 하여, 또는 세계가 유전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으로 이 사회를 멀리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엄격하게 명령하시는 것은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참여이고 이 명령에 충성하는 것을 약화시키는 요소라면 멀리해야 한다는 확신에 서서 권고하였다.
그가 요구한 것은 금욕적인 자기-부정도, 삶의 모든 위안에 대한 포기도, 영혼을 위해 육체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세속적인 쾌락의 무상함과 어리석음과 속임수를 깨달아
그것들을 멸시하고 세상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강요하였다. 인간은 이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그 위험과 혼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마음 속으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될 것인가 하느님이 만물의 척도가
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만일 그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다면, 그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수많은 기준들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분이다. 따라서 진리도 하나이고 선과 악의 기준도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