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stance/♡ 줄리아의...♥

가을의 유서

ohjulia 2005. 9. 19. 03:44
    가을의 유서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이 되어버린 내 작은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조각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 류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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