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합시다.

ohjulia 2005. 12. 30. 06:04
2005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집회서 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복음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예전에 유행했던 유머가 하나 떠올려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요? 아버지가 대기업의 회장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이렇게 힘든 가난한 생활 벗어버리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텐데요. 아버지! 아버지는 왜 이렇게 가난한거에요? 가난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너는 왜 박찬호로 태어나지 않았니?”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님이기를 원했지만, 만약 자신이 박찬호와 같은 능력 있는 야구선수라면 어떨까요? 그 길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되는 길이 아닐까요?

맞아요. 우리들의 가장 큰 단점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대신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는 원망을 가득 간직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모님 때문에, 가족 때문에, 친구 때문에, 이웃 때문에…….

각종 ‘~때문에’라는 이유로 우리들은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아닌 다른 곳에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이 꾸민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도 성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가정은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성가정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들은 단순히 가족 구성원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을 성가정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성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그 가정을 생각해보세요. 문제가 전혀 없던 가정일까요?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가정이었습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어머니, 그리고 양아버지, 또한 사형수로서 어머니 앞에서 죽음을 당하는 아들. 이렇게 구성된 가정을 보면서 ‘와~~ 정말로 행복한 가정이구나. 우리도 이런 가정을 본받아야 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들이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의 가정을 통해 성가정의 기준은 고통이 있고 없고, 또 문제가 있고 없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고통과 어려움의 문제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서로 힘을 모아 이겨냈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합시다.



산맥을 따라 걷다(한비야 / 지도밖으로 행군하라)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