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남이 틀리다는 말을 하지 맙시다.

ohjulia 2006. 1. 7. 05:19
2006년 1월 7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요한 1서 5,14-21

사랑하는 여러분, 14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복음 요한 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지금 저의 별명은 ‘빠다킹’입니다. 즉,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지요. 그런데 저의 예전 별명은 빠다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피 한 방울’ 이것이 바로 저의 예전 별명이었지요. 약간 섬뜩하지 않습니까? 어떤 수녀님께서 저를 보고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칼 같은 성격이라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연유가 되어 ‘피 한 방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답니다. 물론 제가 그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을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수녀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자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생각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종종 보였지요. 그리고 저는 이 모습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신학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신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본당 신학생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날, 글쎄 이 학생이 무선호출기(‘삐삐’라고 불리었지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 무선호출기는 널리 보급되어 있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신학생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무선호출기를 가지고 있는 신학생을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따끔하게 혼을 냈습니다. 물론 제가 분명히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혼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불과 6개월 뒤, 국민 대다수가 이 무선호출기를 들고 다닐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습니다. 무선호출기를 들고 있다고 따끔하게 혼을 냈던 저 조차도 6개월 뒤에는 무선호출기를 들고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어린 그 신학생이 더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고, 그래서 더 옳았던 것이지요. 그 뒤 저는 약간의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늘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확한 구분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지요.

하긴 성서에서 보면 그런 모습을 많이 보게 되지요. 요셉 성인 역시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평생 신조로 삼았던 법을 어기는(아기를 잉태한 성모님을 받아들임) 행동을 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억지 섞인 말씀에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느님의 기준에서는 특별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원칙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인간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원칙이지만, 하느님의 기준에서는 ‘사랑’뿐입니다. 인간 세상의 원칙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칙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할 때,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틀리다는 말을 하지 맙시다.



아름다운 추억하나('좋은 글' 중에서)

한 아이가 하얀 백사장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따스하고 고운 모래를 두 손 가득히
담아서 놀고 있었데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는군요~~

아이가 모래를 담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말았어요.

이것을 이별이라고 한다는군요~~

아이는 흘러내리는 모래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모래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이것이 미련이라고 한다는군요~~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손 안에는
아직도 모래가 남아있었어요.

이것이 그리움 이래요~~

아이는 이 놀이도 싫증이 나자
집에가기 위해 손바닥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었어요 그랬더니
손바닥에 묻어있는 모래가 금 빛으로
빛나고 있었어요.

이것을 추억이라고 한다는군요~~

사랑, 이별, 미련, 그리움, 추억을
이 아이는 다 배우면서 커겠죠~~ ^^*

추억이란건 늘 아름다움으로 우리들
가슴에 아련하게 자리잡고 있는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