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사랑합시다.'를 다섯번 외치고서 하루를 시작합시다.

ohjulia 2006. 1. 18. 07:47
2006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무엘 상권 17,32-33.37.40-51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복음 마르코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저에게는 많은 신발이 있습니다. 신발장에 있는 신발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의 운동화, 검정색과 갈색 구두, 등산화, 기능성 신발, 슬리퍼 2개.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애용하는 신발은 바로 등산화입니다. 물론 등산용이 아니라 작업용으로 신는 신발이지요. 현재 2년째 신고 있는 신발. 그래서 이제는 비가 오면 신발 안으로 빗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이 등산화를 버리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발에 딱 맞거든요. 저의 낡은 신발을 보고서 어떤 분이 등산화를 사 주시기도 했지만, 지금의 등산화가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신고 있습니다.

사실 신발이라면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작업할 때 신는 신발이니 다른 기능이 필요하지도 않지요. 예쁠 필요도, 멋있을 필요도, 또한 다른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제 발에 편하고 그래서 일하는데 전혀 불편 없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신발은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요…….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어떤 물건이든 구입할 때, 기준이 되는 조건이 있지요. 물론 여러 가지 기준을 세울 수도 있지만, 가장 우선시 되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가장 완벽하게 채우는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좋은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고 구입해서 오히려 후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기능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당신께서도 가장 중요한 어떤 기준을 세워서 그 기준에 맞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기준에 맞는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법에 어긋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사랑 때문에 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사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의료행위도 할 수 없었거든요. 더군다나 안식일 다음날에 치료해도 될 것 같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안식일에 치료를 받든, 그 다음날에 치료를 받든지 생명의 위협이 없는 한 그 하루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사랑’이라는 더 중요한 기준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날 치료를 해주셔도 되지만, 하루빨리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록 안식일이지만 치유의 은사를 베푸십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안식일법에만 묶여 있어서, 하느님의 가장 큰 기준인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준과 가장 반대되는 죽음을 선택해서 예수님을 없앨 궁리만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요? 이제는 하느님의 기준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시다.'를 다섯번 외치고서 하루를 시작합시다.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좋은생각' 중에서)

아침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붉게 물든 저녁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노래가 있어 행복하고
꿈이 있어 행복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 행복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기쁨도 슬픔도 맛볼 수 있어 행복하고
더불어 인생을 즐길 수 있어 행복하고

누군가가 그리워 보고픔도
그리워 가슴 아리는 사랑의 슬픔도
모두 다 내가 살아있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누굴 사랑하기 전에
이런 행복을 주는 내 자신을
먼저 사랑으로 감싸줬는지요.